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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민주화" 교수들 숨통 죄기|86명 무더기 해직 파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80년 학계에 불어닥친 시련은 전격작전이었다.
「80년의 봄」이 대학가에서 시작되었기에 국권을 틀어쥐기로 마음먹은 신 군부는 5·17비상계엄선포와 함께 대학가를 덮쳤다. 물론 1차적인 작전대상은 학생지도부였다. 하지만 교수라고 예외일수 없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가장 존경받아 왔더라도 일거에 혼란을 평정하겠다는 군부의 단선적 서릿발 앞에서는「시범케이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5월17일 새벽 비상계엄과 함께 체포대상을 찾아 나섰다. 1차 대상은 한완상(서울대·사회학)·장을병(성균관대·정치학)·서남동(연세대·철학)·이문영(고려대·법학)·유인호(중앙대·경제학)교수 등이다. 이들은 체포된 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해직되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합법적」(?)강제 해직자인 셈이다.
2차 대상은 체포해 수사하고 사표를 받아야 할 교수들. 강만길(고려대·역사학)·김동길(연세대·역사학)·이명현(서울대·철학)교수 등이다. 나머지 3차 대상은 대학총장이나 학장을 통해 사표를 받은 변형윤(서울대·경제학)·김진균(서울대·사회학)교수 등이다. 모두 합해 86명이다.
당시의 해직은『사표 내셔야 겠 습니다』라는 한마디에 두말없이 던져야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내력은 두 가지다. 진짜군부에서 지정해 준 경우와 대학당국, 즉 재단 측이 평소 눈밖에 났던 교수를「떡본 김에 제사지내듯」함께 묻혀 해직시킨 경우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 주요대학에서 6명씩이 쫓겨났다. 반면 광주에 소재한 전남대(12명)와 조선대(15명)는 특별히 많이 배당되었다.
지식인 탄압은 유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신 군부가 처음부터 굳은 결심으로 추진한 역점사업이었다. 신 군부의 통치구도는 허문도씨(전 통일원장관)의 유신실패원인분석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유신은 언론과 지식인을 잘못 통제해 망했다는 인식이다.
이같은 신 군부의 인식은 한 고위장교가 모 교수를 신문하면서 자신감 넘치게 내뱉었던 말에서 나타난다. 그는『이제부터 대학에서 어용교수란 말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필코 그렇게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민주화」운운하는 교수들이 있기에 어용 교수라는 말이 생기므로 앞으로 민주화 운운하는 소리가 대학교수들 사이에서 나오지 않게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고위장교의 이 얘기는 당시 교수사회에 회자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 교수들은『그 정도 결심이라면 이 정권도 18년은 가겠구나』고 탄식했고 어떤 이는 나름의 판단 하에 5공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 군부는 해직 이후에도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얼어붙게 하는 채찍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82년 여름 일부대학에서 해직교수를 대학내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채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문교부는 특별지침을 내러 대학관련 연구직에도 취업하지 못하도록 했다. 기타 연구 관련 직도 음양의 압력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연히 많은 교수들은 천직인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다. 형편이 나은 교수들은 개인연구소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는 어려운 살림을 꾸리기 위해 낯선 길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광우 교수(전남대·정치학)는 구멍가게를 내고 튀김장사를 시작했으며, 부인은 보험사 외판원으로 생계를 도왔다. 변변찮은 수입이라 튀김장사를 그만둔 이 교수는 몇몇 해직교수들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꿀벌을 치기도 했다.
복직의 서광은 엉뚱하게도 83년 여름 대법원에서부터 비치기 시작했다. 대법원민사부는 경북공전 박두포 교수(국문학)의 면직처분효력정지 가처분신청에 대한 재단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박 교수의 복직을 최초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곧 이은 문교부의 발표는「복직허용」이되「원 소속대학복직은 안 된다」는 껍데기아량에 불과했다. 원대 복귀의 명예회복은 인정하지 않지만 취직은 허용한다는 의미다. 명예를 존중하는 교수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하지만 교수들은 해빙분위기를 감지하고 적극적인 복직운동에 나섰다. 해직교수협의회가 출범했다. 음식점에서 모여 활동계획을 논의할 때면 항상 옆방이나 복도에는 기관원이 엿들었지만 교수들은 개의치 않았다. 떳떳하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기관원들과 사귀게 돼 회의가 끝난 후 결정사항을 브리핑 해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압력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다른 대학에 좋은 대우로 취직시켜 줄 테니 조용히 있으라』는 회유에서부터『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하겠다』는 협박까지 동원됐다.
당시 협의회의 궂은 일을 도맡았던 이명현 교수는 테러까지 당했다.『병신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이 있은 얼마 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일어설 때였다. 건강한 젊은이 몇 명이 구석자리에 있다가 같이 일어서면서『아이 구, 선생님 아니십니까』라며 아는 체했다. 이 교수는 제자인줄 알고『한잔 더하자』는 권유에 이끌려 으슥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순간 와락 달려든 청년들이 무조건 두들기기 시작했다. 취중에 정신이 번쩍 든 이 교수는 한 명의 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목을 붙들린 사람의 비명소리에 나머지가 모두 도망쳤지만 이 교수는 붙잡은 사람마저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후환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84년 여름 정부는 학원자율화조치와 함께 교수들의 원대복귀를 허용했다. 이후교수들에 대한 표면적인 학술탄압은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교수들은 아직까지 학술활동을 옥죄고 있는 5공, 보다 정확하게 말해 유신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지적한다. 다름 아닌 교수재임용제다.
75년부터 시행된 재임용 제는 명분상 교수들의 연구촉진과 자질향상을 표방했지만 교수들은 대부분 이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교수들은 74년 백낙청 교수(서울대·국문학)파면사건이후 교수들을 손쉽게 해직시키기 위해 만든 악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74년 유신헌법의 개헌을 주장하는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한 백 교수를 파면한 것이 사회문제화 되자 당시 고위층에서『교수자리 하나 뺏는 게 이렇게 어렵나』라는 불만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재임용 제라는 장치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외국의 예를 인용하지만 외국의 재임용 제라는 것도 사실은 조교수정도에만 적용되지, 부교수 이상은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6공 이후 해직교수가 5공이전보다 많다는 얘기도 사실은 재임용 제 때문이다. 많은 사학에서 재단의 일방적 징계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따라서 학계의 5공청산은 재임용 제가 폐지될 때 일단락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교수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자 소망이다. <끝><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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