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표 의식 고령연금법만 처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국민연금제도 개혁이 또다시 좌절됐다. 하루에 800억원씩 연금 부채가 쌓여 가고 있는데 국회는 끝내 개혁을 외면했다.

반면 노인들에게 생색낼 수 있는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은 의결했다. 이 돈을 주려면 내년에 당장 2조5000억원이 필요하고, 2030년에는 19조원이 들어간다. 모두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이자고 시작한 연금 개혁이 오히려 부담만 늘린 꼴이 됐다.

국회는 2일 본회의를 열고 정부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한나라당이 낸 수정안도 부결됐다. 이로써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연금제도 개혁은 매우 어렵게 됐다. 연말 대선과 내년 총선 등 정치 일정을 감안하면 연금 개혁은 1~2년 내 어렵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배준호 한신대 교수는 "최악의 상황은 대선에서 후보들이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연금제도 개정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 물 건너간 개혁=국민연금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이대로 가면 2047년이면 국민연금기금이 완전히 고갈돼 96조원의 적자가 나게 된다.

문제는 앞으로 연금제도를 고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면 쫓길수록 제대로 된 개혁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좋은 예다. 이탈리아는 1970~80년대 집권당들이 표를 의식하다 개혁 시기를 놓쳤다.

92년 뒤늦게 개혁에 나섰지만 반대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미온적 개혁에 그쳤다. 2003년에는 1100만 명의 노동자가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여 국가 전체가 마비되는 사태를 겪었다.

그동안 우리 정부의 연금 개혁안도 계속 뒷걸음질 쳐 왔다. 2003년 정부안은 연금 보험료를 9%에서 15.9%로 올리는 것이었으나 이번에 본회의에 상정된 안은 12.9%까지만 올리는 것이다. 15.9%로 올리면 베이비붐 세대의 퇴장으로 노인 부양 부담이 적어지는 2070년대까지 연금기금이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낸 정부안은 2065년까지 18년을 늦출 뿐이었다.

국민연금법 개정이 부결되면서 기금 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국민연금기금의 규모는 200조원에 육박하고 있으며, 2030년대면 1700조원의 거대 기금으로 성장한다. 제대로 운영하면 금융시장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지만, 운용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높이지 못하면 금융시장의 최대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 기초노령연금 도입=내년 1월부터 70세 노인 가운데 소득.재산이 적은 60%는 매월 8만9000원씩 기초노령연금을 받게 된다. 내년 7월부터는 65세 이상 노인으로 확대된다. 대상자는 소득과 재산을 점수화하는 과정을 거쳐 선정하게 된다.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도 기초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고, 부부인 경우는 개인별로 각각 8만9000원씩을 받게 된다.

문제는 돈이다. 지난해 초까지 정부는 "재정 부담이 너무 크다"며 기초노령연금법을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60%라는 지급 기준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기초연금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진수 연세대 교수는 "노인들에게 일괄 지급하는 노령연금보다 저소득층 노인을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직접 지원하는 것이 지원 효과도 크고 재정 부담도 적다"고 말했다.

국회가 이번에 국민연금제도는 그대로 두고 노령연금제도를 도입하면서 '연금 역전'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국민연금보험료를 꼬박꼬박 낸 사람이 보험료를 덜 낸 사람보다 총 연금액이 줄어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30년간 매월 18만원씩 보험료를 낸 사람이 기초노령연금 대상자가 안 되면 국민연금만 월 80만원씩 받게 된다. 그러나 보험료를 15만원만 낸 사람이 기초노령연금을 받게 되면 총 82만원(국민연금 73만원, 노령연금 9만원)을 받게 된다. 김상호 관동대 교수는 "누가 열심히 일해서 노후 준비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영훈.김은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