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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여행·조각·과학·무용 … '조선의 프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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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선의 프로페셔널
안대회 지음, 휴머니스트, 436쪽, 1만9000원

줄여서 '프로'라고들 하는 프로페셔널은 돈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파는 사람을 뜻한다. 즉 직업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전문가이다. 명지대 국문과 교수인 지은이는 이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하는 사람'으로 풀었다. 그리고 200년 전 이 땅에서 자신의 전문가적 기예로 부귀공명 등 세속의 기준을 훌쩍 뛰어넘은 열 명을 캐냈다. 문자 그대로 캐낸 것이 전기나 회고록은커녕 변변한 자료도 없고 저서도 별로 남기지 않은 이들의 치열한 삶을, 각종 문헌에서 관련자료를 뒤져내 몽타주 식으로 엮어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서양식 자명종 시계를 만든 기술자 최천약 편을 보자.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 공적 기록은 물론, 18세기 각 분야 명사를 기록한 '병세재언록', 국방방책을 제안한 '상두지',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 같은 저술, 황연석의 한시 '자명종' 등이 인용된다. 이 정도니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데 6년이 걸렸다는 설명이 이해된다.

등장인물은 다채롭지만 한 명을 제외하곤 주류에 끼지 못했던 이들이다. 여행가, 바둑 기사, 조각가, 무용가, 책장수, 천민 시인 등이 당대에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을 리 없다. 이런 형편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이름을 파자(破字)한 칠칠(七七)을 자로 했던 기인 화가 최북을 빼고는 대부분 교과서는 물론 어지간한 역사관련 책에서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지은이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평한 정철조는 예외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과 지평(持平)이란 벼슬을 지냈다. 그러면서 호를 석치(石痴)라 할 정도로 조선 벼루의 신경지를 개척한 조각가였고, 진경산수를 개척한 정선과 어깨를 나란히 한 화가였다. 뿐만 아니라 무거운 물건을 드는 인중, 높이 들어올리는 승고, 회전하는 물레인 마전 등을 직접 만들어 쓴 기술자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기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당시 서양문물에도 관심이 많아 남의 집에 서양서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안면이 없는 재상판서라도 반드시 선을 넣어 빌려서 빼왔다고 한다. "동전 삼 백문이 생기면 술꾼노릇 해야지/죽은 뒤에 문장을 남기는 건 우스워 죽겠네"란 시를 남길 만큼 호방한 성품이었던 그는 문집을 남기지 않아 지은이 같은 눈 밝은 이를 만나서야 되살아난 셈이다.

천하를 내려다보며 살아간 이들의 버팀목은 자부심과 오기였다. 최천약은 중국 작품을 보고는 "나보다 나은 줄 모르겠다"고, 책장수 조신선은 "천하의 책이란 책은 모두 내 책이지요. 책을 하는 천하 사람 가운데 나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게요"라고 자부했다.

최북은 자신의 뜻을 꺾기 싫어 스스로 눈을 찔렀고, 당대의 문장가 이용휴의 인정을 받았던 천민시인 이단전은, '영낙없는 머슴'이란 뜻의 이름에 더해 하인놈이란 뜻의 '필한(疋漢)'을 호로 삼아 시대와의 불화를 내놓고 다닐 정도로 오기가 강했다.

소설적 상상력이 아니라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 숨은 기인들의 삶을 복원해낸 이 책은 역사의 빈틈을 메우는 데서 나아가 현대인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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