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병 지연/선거혁명 이루자(주권의식 확립위한 캠페인: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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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향의리”찾는 후보 즉각 배격/여 장기집권 따른 지역 편중인사 지양돼야
지난해 연말 서울 Y구에는 하얀바탕위에 검정색 글씨로 격문(?)을 적은 포스터가 나붙었다.
『고향을 찾읍시다.』
전신주·담벼락에 붙은 포스터는 어떤 모임이나 집회를 알리는 내용도 없었고 딱 하나 「○○동 ○○향우회」라는 출처만 적혀있었다.
이 포스터는 모정당 국회의원과 연결된 선거운동 조직에서 「고향연대감」을 고취시키기 위해 머리를 짜낸 전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출신도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똘똘 뭉쳐야 되고 특정정당·특정후보를 맹목적으로 지지하자는 지역감정 풍토병의 생생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선거현실에서 금권선거도 문제지만 「내 한표로 주권혁명을 이루자」는 공명선거 운동은 곧 지역감정 망령에서도 벗어나자는 처절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학연·혈연도 만만치 않지만 지연을 물고 늘어지려는 후진성은 가장 심각한 폐해를 낳아 대통령 선거와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생생하게 실증됐다. 후보자는 당선되기 위해 지연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표를 모으려 하니 유권자가 이에 얼마나 초연할 수 있는가가 과제인 셈이다.
지역감정의 추악스런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등장하는 곳은 서울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이나 영남은 아예 다른지역 출신이 명함내밀기도 힘든 실정이니 지역기반의 정당성향을 논외로 치면 후보자간에는 갈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서울 모지역에서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있는 P씨는 이미 정도를 넘어선 지연 엮기의 부작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권자가 새로 이사오면 특정정당의 조직원들이 동사무소에 가 그 사람의 본적을 확인하고 같은지역 출신이면 집으로 찾아가 「환영한다」고 인사하고 ○○향우회에 가입시킨다. 연말 망년회도 그 지역 사람만 끼리끼리 모이고 그쪽 인사가 경쟁정당의 선거운동원으로 들어가면 『고향을 버린 놈』이라는 욕설과 눈총 때문에 버텨내지 못한다.
영·호남을 비롯해 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인 서울은 뭉치표가 지역감정을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라는게 정치인들의 일반적 시각.
지역감정 바람이 본격적으로 거세지기 시작한 것은 87년 12월 대선과 88년 4월 13대총선 무렵부터 였다는게 공통된 의견이다.
서울지역 지구당 위원장들에 따르면 그전까지만 해도 한두군데 출신 향우회만 선거에 설쳤는데 선거 직후부터는 강원·충청 향후회는 물론 경기 향우회까지 선거에 본격 가세할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서울을 둘러싼 인천·성남·부천 등 경기지역 도시도 지역감정으로 몸살을 앓고있다.
13대때 부천에서 군소정당 후보로 출마했던 H씨는 이런 경험담을 갖고있다.
『하루는 ○○향우회 소속이라며 몇사람이 찾아와 「우리 ○○인들이 당신을 밀기로 결정하면 당신은 금배지가 보장된다. 그러면 ○○당에 입당하겠느냐고 제의했다.』
구체적인 선거운동 방법으로 들어가보면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수법이 많이 눈에 띈다.
우선 특정지역을 특정정당과 붙여 몰아붙이는 전략이다.
호남사람들은 「경상도 대통령」「경상도 당」을 찍지말자고 외치고 영남인들은 「선생님당」「전라민국」이라고 비꼰다. 충청도 출신도 『우리라고 멍청히 앉아있을 수는 없다』며 세규합에 어느지역 못지않게 나서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강원도 통천 출신인 정주영씨가 신당을 만들자 벌써부터 『강원도에선 적잖이 먹힐 것』이란 성급한 소문이 나도는 판이다.
서울이나 위성도시에 나오는 후보들은 가장 먼저 출신도별 유권자 분포부터 살핀다고 한다.
특정지역이 40%를 넘으면 여타 20%에 불과한 지역의 후보는 고전을 각오해야 한다는 논리고,실제로 그런 투표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지역감정 망국병을 고치기 위한 처방전은 찾아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유권자가 후진적 「고향 의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장기적으로는 여권의 장기집권에 따른 TK(대구·경북지역) 편중인사 등 구조적 결함을 고쳐야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
주목할만한 점은 유권자나 사회운동단체의 상당수가 「지역감정 조장책임자」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감정 해소 국민운동 협의회의 김지길 상임의장은 『지역감정 타파를 외치면서 뒤로는 지역감정을 부채질 하는 몇몇 정치지도자들이 각성해야 하며 이들의 잘못을 응징하는 시민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협의회는 정치권에 지역감정 자제를 호소하기 위해 김영삼 민자당·김대중 민주당 대표와의 간담회를 추진하고 있다.
50여 사회운동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공명선거 실천 시민운동협의회의 간사를 맡은 장신규 경실련 기획실장은 『지난번 기초·광역선거때 우리가 주장한 「이런사람은 뽑지말자」속에도 지연·학연을 이용해 표를 모으려는 후보가 들어있었다』며 『표를 결정하는데 끊어야할 모든 연줄속에 첫번째 대상이 지연』이라고 강조했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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