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한국 민중사」필화|법정까지 내몰렸던 민중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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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0년대 출판 탄압의 절정은『한국민중사』필화 사건이다. 87년2월 당국은『한국민중사』의 일부 내용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판금조치하고 이 책을 낸 풀빛출판사 대표 나병식씨(42)를 구속 기소했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사서를 법정에 불러 세운 일은 고금에 드문 일이어서 세인의 관심은 그만큼 높았다.『한국민중사』는 원시시대부터 80년대 광주항쟁까지를 다룬 통사. 30세 전후 석·박사 과정의 젊은 연구가 6명이 70년대 이후 국내 학계의 연구성과를 민중사관에 입각하여 재정리했다.
2권으로 된 이 책의 특징은 ▲한국사의 주체를 민중에 두고 밑에서부터의 총체적 역사상을 체계화하려고 노력했고 ▲근 현대사에 되도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으며 ▲해방 직후 소련과 북한의 활동은 물론 미군정, 6·25, 분단시대, 친일관계 등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금기시 되어왔던 영역으로까지 서술범위를 확대시킨 점이다.
5공이 6·29선언을 넉 달 앞두고 이 책을 문제삼은 원인을 알아보자.
검찰의 33개항에 달하는 공소이유를 압축하면 민중을 역사주체로 설정한 뒤 50년대 이후의 노동·농민운동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서술하거나 현 한국사회를 신 식민지 사회 및 예속 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 반국가 단체인 북한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를 제기한 거의 모든 항목에서 전체적인 문맥을 살피지 않고 단지「노동자」「농민」「사회주의」「계급」「민족해방운동」등의 용어 및 표현을 하나하나 떼어내서 문제를 삼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같은 사실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발행인 나씨의 진술, 증인으로 나선 교수들의 증언 및 감정인들의 의견서를 통해 낱낱이 입증됐다.
87년 5월27일 서울 형사지법 제113호 법정에서 열린 제2차 공판.
나씨는 모두진술에서『이 책이 있기까지는 이 책과 유사하거나 이보다 훨씬 진전된 논의를 담은 무수한 연구서와 연구논문들이 존재해 왔으며 이 책은 단순히 이런 논문들을 통사의 형태로 한데 모은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고『이 책을 문제삼는 것은 해방 이후, 특히 70년대 이후 불모의 상황에서도 부단한 발전을 이루어온 역사학을 비롯한 우리나라 사회과학 전반의 거의 모든 성과를 문제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검찰측은『역사의 원동력은 인간의 생산활동이었고 그것의 담당자인 생산대중이었다』,『현재 한국사회에서 민중이란 민족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농민·도시빈민·진보적 지식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광주민중항쟁 및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은 민중주체 민족통일운동의 본격적 전개를 예시하는 것이었다』등을 예로 들어 이 책이『마르크스적 유물사관과 계급투쟁의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달 뒤인 6월29일의 5차 공판. 이 날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온 한양대 정창렬 교수는 공소사실 중『이 책은 민중의 편에 서서 유물사관에 입각해 씌어졌다』는 부분에 대해『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은 학계에서는 이미 상식에 속하는 일』이라면서 이미 1백만부 이상 팔린 이기백 교수의『한국사신론』에도「민중은 한국역사의 기본담당세력」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검찰측의 주장을 근저에서부터 부정했다.
『한국민중사』 법정공방이 열을 더해 가는 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잇따른 성명이 발표되는 등 파장은 확대되어 갔다.
87년 5월29일 동양사학회가 주관한 제30회 전국역사학 대회에 참가한 교수·교사 등 3백27명은『재판이 진행 중인 한국민중사 필화사건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므로 학계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고병익·길현모·민석홍 교수 등은 이와 함께『정부가 추진 중인 대한민국사 편찬은 정부와 견해를 달리하는 역사 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발행인이 구속되는 풍토에서 결코 객관적 서술이 될 수 없으므로 재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고기종사 등 일본의 조선사연구자 19명은 87년 5월13일『일본이나 구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민중사를 쓰는데도 권력과의 긴장관계를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러나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인식이 죄가 된다면 왕이나 통치자만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조선사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로서 커다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의 호소문을 보내왔다.
결국 87년 8월12일 9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측의 공소사실 중 일부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여 나씨에게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판결내용을 보면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며 ▲민중의 개념은 포괄적이라고 서술한 부분 등 18개 항목은 무죄로, ▲미국의 원조가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모순을 심화시켰다고, 표현한 부분과 6·25, 독점자본 수탈, 남북관계, 친일관등 15개 항목은 유죄로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 중 허위로 드러난 공소이유는 판결문에 기재도 하지 않은 채 그 부분을 유죄로 인정하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 어정쩡한 판결에 대해 검찰·피고인 양측은 모두 항소했으나 90년 여름 재판부의 항소기각으로 원심이 확정됐다.
어쨌든『한국민중사』는 민중이 역사의 원동력이라는 민중사관을 일반인에게까지 확산시켰고, 공간적으로는 북한·발해까지, 시간적으로는 광주민주항쟁까지로 현대사의 지평을 넓혔으며, 해방공간·미군정·분단시대 등 현대사 서술의 금기를 깨뜨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은 사건화 되고 난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2년 동안에 5만질(10만부)이 팔렸다. 이는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 필화사건의 진짜 중요성은 그후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됐다는 점이다.
『민중의 역사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오직 도도하게 흘러갈 뿐이다.
나병식씨는 항소이유서의 끝 부분을 이렇게 맺었다. <최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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