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인자 마음 사로잡아야「2인자」|고속도 질문에 국교장 상경 답변|25면에서 계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1인자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느냐에 따라 누가 2인자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대통령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쏟았는지와 함께 그의 단도직입적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한가지. K씨의 증언을 옮겨본다.
『70년대 중반이었죠. 여름철인데, 청와대 뒤편 북악산 정상부근에 아침부터 까마귀 수십 마리가 날아와 앉아 울어댔습니다. 때마침 각하도 경내에 계시고 해서 신경들이 곤두서있는데 듣기 좋을리 있겠습니까. 초병들이 돌멩이 몇 개를 던져봐야 그뿐이고, 총을 쏘자니 소리가 너무 크게 날 것 같고….』

<"불길" 까마귀 소탕>
차 실장 역시 기분이 상해 있었던 모양이다.
오전 내내 골머리를 앓다가 까마귀들이 제풀에 물러갈 조짐이 보이지 않자 실장은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갔다. 각하도 귀가 있으니 심기가 상했을 것이다.『각하, 소리가 계속 나니 불길합니다.
『….』
『각하, 소탕하겠습니다.』박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차 실장은 그 길로 인근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사냥철 외에는 관할경찰서 무기고에 보관하도록 되어있는 민간인 소유 엽총들을 꺼내 청와대로 갖고 오도록 지시했다.
『사격이라면 날고기는게 경호원들이니 굳이 인원을 선발하고 말고가 없었지요.』-K씨의 말이다.
비번인 경호원 10여명이 두 패로 나뉘어 한 쪽은 북악산에 다른 한쪽은 바로 건너편 인왕산에 각각 배치됐다.
곧이어 북악산 쪽에서 총성이 일제히 터졌고, 혼비백산한 까마귀 떼는 건너편 인왕산으로 황급히 날아갔다. 또다시 인왕산에서 일제 사격.
북악산 길을 잘못 잡아든 까마귀 떼는 북악∼인왕산을 두 차례 가량 왕복하며 기다가 마침내 동료의 시체들을 남기고 송추 방향으로 멀리 사라졌다.
아침 산책 때 박대통령은 혼자 이것저것 구상하기를 즐겨 이때만은 수행경호원이 따라붙지 못하게 했다. 할 수 없이 멀지 감치서 대통령 신변의 이상 유무를 살필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산책코스에 굵직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에 대통령이 가려져 잠깐이지만 경호에 사각이 생기는 것이다. 차 실장은 며칠을 두고 고민했다. 70년대 중반의 일로 역시 경호원 출신인 L씨의 회고.
『실장이 고민 끝에 뭔가 결심한 눈치더니 종로구청에 협조요청을 해 밤중에 일꾼들을 불러왔습니다. 문제의 나무를 밑동까지 베어내고 시멘트를 그 위에 입혀 감쪽같이 만들어 놓았지요.
다음날 아침에 박 대통령이 산책을 하고도 아무 말이 없자 차 실장은『각하께서 눈치 못 채셨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며칠 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모 총무비서관이 연무관(현재의 영빈관 자리) 신축계획서를 갖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는『부지 공간확보를 위해 이 지점의 나무는 베어내야겠습니다』며 나무 한 그루를 자르자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정색을 하며『엊그제 나 몰래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고 또 잘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안돼』라며 질책했다.
엉뚱하게 노여움을 뒤집어 쓴 비서관은 대통령이 화를 낸 영문도 몰랐다가 나중에야 경위를 알았지만 막강한 경호실장인지라 하소연도 못한 채 냉가슴만 앓더라고 L씨는 전했다.

<나무 한 그루도 신경>
청와대 안에서도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인해 온갖 소동이 벌어지는 판이니 외부행차 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L씨의 증언.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였습니다. 각하가 승용차로 부산에 가는 길이었는데, 신갈 부근에서 고속도로의 주변 경관을 유심히 살피던 각하가 갑자기「도로변의 저 나무는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하문」은 동승한 정인형 경호처장을 통해 다른 수행차량의 안재송 부처장에게 무전으로 전달됐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에 안 부처장으로부터『경부고속도로 신갈지점 도로변의 나무이름을 알아내라』는 연락이 떨어졌다(정경호 처장과 안 부처장은 10·26때 모두 총격으로 숨졌다).
『경호실에서 그 먼 곳에 무슨 나무가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한국도로공사에 연락해 나무이름을 급히 알아내 보고하라고 독촉했죠.
도로공사 사장실부터 실무진까지 온통 소란을 벌인 끝에「족제비싸리」라는 이름이 나왔다.「어명」이 떨어진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북아메리카 원산의 족제비싸리는 빨리 자라고 생명력도 강해 일제시대부터 사방지나 황폐한 땅을 복구하는데 널리 심어졌다는 것이다.
70년대 후반 어느 날 경상북도 구미부근 고속도로를 지나던 박 대통령이 또 궁금증을 발동했다. 도로에서 바라보이는 한 국민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교정에 있던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오늘은 안보이니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L씨의 기억.
군 교육청까지 비상『당시 문교부장관이 박찬현씨였습니다. 갑작스런 경호실의 연락에 도·군 교육청까지 비상이 걸린 눈치였어요. 다음날 아침 그 국민학교의 노 교장이 브리핑자료를 갖고 상경해 문교부장관과 함께 청와대로 왔더군요.』
시골 국민학교의 교장은「플라타너스 나무에 송충이가 많이 꾀는데, 나무 바로 밑에 음료수로 쓰이는 우물이 있다. 송충이가 우물 속으로 자주 떨어져 어린이들에게 비위생적이라 직원회의를 거쳐 최근 잘라냈다」는 경위설명과 함께 학교의 조감도를 내놓으면서 나무가 있던 자리와 우물의 모양 등을 설명했다. 경호실장은 덜덜 떠는 교장을「걱정 마시라」고 달래놓고는 집무실에 들어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L씨는『각하는 실장의 보고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며 장관과 교장도 그제서야 안심하며 돌아갔습니다』고 전했다.
대통령의 기침 한 소리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폭풍으로 변하고 그 바람에 아랫사람들은 숨을 죽여야 하는 절대권력의 희화적인 풍속도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청와대 경호실은 그들의 권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노재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