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이합집산… 정치불신 가중(결산 13대국회: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여소야대 실험 “물거품”/출범때 당 다 소멸… 거여강야로 「힘의 정치」 재발/민생뒷전에 두고 대권암투에 집착
헌정사상 초유의 4당체제 여소야대형태로 출범한 13대 국회가 4년도 안되는 사이에 양당체제 거여소야로 모습을 바꾸는 대격변 속에 18일 정기국회 폐회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민정 1백25명,평민 70명,통일민주 59명,공화 35명,한겨레민주 1명,무소속 9명의 의석분포는 거듭된 이합집산끝에 민자 2백14명,민주 78명,무소속 6명의 모습으로 마감사진을 찍었다. 개원 당시의 국회의원 2백99명 전원이 소속정당을 옮기거나 타계(2명),입각으로 중도하차하는등 신분이 달라졌다는 사실에서도 우여곡절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여소야대는 3당합당에 따라 거여약야체제로 바뀌었고 이는 다시 막바지 야당의 통합으로 강야가 출현,현재의 양당체제로 재정비됐다.
당초의 4당구조는 「황금분할」(김재순 국회의장개원 개회사)로 불릴만큼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할 것으로 국민적 기대가 적지않았다.
길거리로 표출되던 민주화열기를 수렴,수습하고 권위주의시대의 청산 및 민주개혁,새로운 틀의 정치문화 정착등 시대적 과제까지 겹쳐 13대 국회의 시동은 자못 장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소야대구도에 대해 일부에선 국회의 권능이 갑자기 비대해짐으로써 행정부의 지나친 위축을 초래했고 당리를 앞세운 여야 각 정파의 끝없는 줄다리기로 정치불안의 요인이 됐다는 비판적 시각도 없지 않다.
당초 4당체제 자체가 이념이나 정강정책의 차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 마치 프로야구팀처럼 철저한 지역색을 반영한 소산이란 점에서 사안별 정책연합등 선진형 정치를 끝까지 기대하기는 취약점이 많았던게 사실이다.
더군다나 4당이 1노3김의 성격이 강해 4·26총선으로 재기한 3김의 정치적 진로모색에 따라 정국도 같이 부침했다.
이런 와중에서 민자당은 몇가지 시나리오로 정국재편을 꾀했다. ▲정계를 보수와 혁신으로 나눠 민정당과 평민·민주·공화당이 모두 합치는 대보수연합 ▲민주당의 일부 보수파와 공화당을 묶는 소보수연합 ▲그리고 이들과 통합은 않더라도 정책적으로 제휴하는 정책연합등이 그런 것들이다.
평민당이 광주청문회를 주도하는등 국회에서 사실상 야권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노태우­김대중 회담등으로 정국은 민정­평민중심으로 움직여 가는듯 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위축되고 지방의회선거가 예정대로 90년에 실시되게 되면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세력은 고사할 판이됐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영삼 총재의 대세반전노력이 공화계의 이해와 일치한데다 민정계의 정계개편시나리오와 맞물려 90년 1월22일 마침내 3당통합으로 나타나게 됐다. 1노2김은 그것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했다.
개헌선(2백석)을 14석이나 넘긴 거여의 출현으로 정계의 관심은 내각제개헌의 추진여부가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소수세력으로 전락한 평민당의 장외대회등으로 개헌저지를 외치고 나섰으며 야권통합이 과제로 등장했다.
애초 통합의 압력속에 평민당과 민주당의 통합협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채 홍역을 치러야했고 각 당마다 재야세력과의 제휴·영입노력을 벌여 그동안 야당밖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재야세력들이 평민·민주당에 들어가 재야권의 장내 진입이 이뤄졌다.
결국 평민·민주양당은 거의 꺼져가던 통합협상을 겨우 재가동해 지난 9월 마침내 야권통합을 달성했다.
이로써 13대 총선에 참여했던 정당들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여야당이 출현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진기록을 남기게 됐다.
그러나 합당체제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민자당은 내각제개헌추진이라는 합당당시의 합의를 김영삼 대표가 깨는 바람에 이를 둘러싼 내부갈등이 김대표의 마산행등 분당일보전의 상태로까지 악화되기도 했다.
또 대통령후보를 노린 당내의 암투로 소련방문기간중 김영삼­박철언의 대결 파동,월계수파문,제주발언소동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아울러 불분명한 정치일정,대권후보선출시기의 미정등이 정치를 불투명한 안개속에 밀어넣음으로써 장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의 제시는 커녕 민생등 현안마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정치불신을 가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대통령의 모호한 통치방식과 2김의 무한 대권경쟁이 함께 비판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몸집이 커진 여당은 대화와 타협보다는 수적 우세를 앞세운 힘의 정치를 재개했고 야당은 의원직사퇴·단식등 극한투쟁으로 맞섰다. 툭하면 단독국회·날치기·몸싸움에 유혈폭력이 난무했다. 국민들의 정치불신은 극에 달해 혐오감을 부를 지경에 이르렀다.
통합정국의 국회는 국민과는 상관없이 움직여 간다는 인상을 주었다.
야대가 주도한 초반까지는 활기있는 활동으로 시대적 사명과 국민기대에 어느정도 부응했다. 그대신 집권당의 동요라는 정치불안이 계속됐고 3당합당뒤론 정치의 안정은 이뤄졌다는 주장에도 날치기와 몸싸움의 옛시절로 되돌아가 정치불신만 더욱 증폭시켰다는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3당합당이나 야권통합이 정치노선이나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특정인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른 것이어서 그것이 정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론 여소야대라는 정치발전의 실험무대만 깨뜨려 버렸다는 아쉬움을 남긴 셈이 됐다.<허남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