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7가] 서울운동장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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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서울운동장은 무엇일까 요? 마음의 구장입니다. 승리의 환호와 패배의 눈물, 그리고 그것들을 다 어깨동 무한 추억이 서려 있습니다. 어디 학생들 뿐이었습니까. 2류 국제대회서 우승만 해도 김포공항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그 시절 그 곳은 고달픈 삶의 시름을 토해내던 온 국민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대학농구 ‘3월의 광란’이 한창인데 당시 한국엔 ‘서울운동장의 광란’이 있었습니다. 바로 봄부터 가을까지 뜨겁기만 했던 고교야구의 열기였습니다.

대통령배를 시작으로 청룡기-봉황대기-황금사자기로 이어진 고교야구는 각본없는 파노라 마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들 대회도 모자라 11월에 각 대회 4 강 이상 오른 팀들끼리 겨루는 우수고교초청대회가 생겨나고, 한 라디오 방송은 아침 9시부터 하루 4경기를 종일 중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아나운서들의 단골 오프닝 멘트가 있었는데 "여기는 성동원두(城東原頭)~"였습니다 . 도성 동쪽의 넓은 벌판, 서울운동장이 태어날 때부터 단 별명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그곳을 거쳐갔습니까. 해마다 고교 야구 최고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되는 ‘이영민 타격상’으로 유명한 이영민은 서울운동장 최초의 아치를 그렸고, 경동고 백인천은 고교생 첫 홈런을 날려 ‘괴력의 타자’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알렸습니다.

아직도 미스테리인 기억도 있습니다. 1975년 대통령배 1회전서 보성고 투수 이창호는 무실점 쾌투를 하다 1-0으로 앞선 9회 아웃 카운트 한개를 남겨놓고 광주일고 이현극에게 굿바이 투런 홈런을 맞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공교롭게도 투아웃을 잡고난 뒤 스탠드에서 담장을 넘어 마운드까지 달려온 팬과 악수를 나눈 직후였습니다. 이 홈런으로 기사회생한 광주일고는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 김윤환의 고교야구 최초 3연타석 홈런을 앞세워 최강 경북고마저 대파하고 광주일고 야구의 르네상스를 활짝 열어 젖힙니다.

운동장 밖 풍경은 또 어땠습니까. 경기가 끝난 후엔 지면 진 대로 슬퍼서, 이기면 이긴 대로 기뻐서 성동원두는 주막(酒幕) 장터로 변했습니다. 야구를 핑계(?) 삼아 목청을 잔뜩 돋구고 간만에 만난 동창, 선후배와 향우들이었으니 어찌 술맛이 안 돌았겠습니까.

서울운동장은 서민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부러진 배트를 못질해 붙이고, 찢어진 글러브를 꿰매 쓰고, 포수 마스크가 없어 눈에 밤알 자국 내기 일쑤였던 그 시절, 값 싸면서 쓸만한 ‘중고’ 야구 용품 점들 이 근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둔하기 짝이 없는 서울 촌놈의 추억이 있습니다. 군경·초등학생 입장료가 160원이었던 때 야구가 너 무 보고싶어 직장 다니는 큰 누이에게 용케 변통을 해 혼자서는 처음으로 성동원두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1, 2경기를 보고 3경기가 중반쯤 지나 노을이 깔리면서 슬그머니 근심이 생겼습니다. 집에 갈 일에 덜컥 겁이 난 것입니다. 올 때는 야구 본다는 마음에 정거장수까지 꼬박꼬박 세었지만 뒷일은 내팽개쳐 둔 탓이었지요 . 일단 스탠드 맨 꼭대기로 올라가 거리를 살폈는데 정 안되겠다 싶어 그 길로 운 동장을 나왔습니다. 이후는 칠흑 속의 헤맴이었습니다. 그나마 오다 본 정동 ‘ MBC’ 전광판만 쫓아 무작정 걸어 광화문까지 당도하고, 바로 무단횡단 해 ‘이충 무공 동상’을 청소하던 아주머니께 물어 간신히 막차를 타고 귀가할 수 있었습니 다.

1926년 동대문 옆 성터에 지은 최초의 근대 체육시설, 경성 운동장 으로 태어난 서울운동장은 100년 한국 야구의 산실이요 터전 이었습니다. 1982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잠실야구장이 세워지면서 동대문야구 장으로 격하(?)됐던 서울운동장은 이젠 개발의 논리에 밀려 흔적 조차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의 서울운동장은 언제나 서울 중구 을지로 7가 1번지,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구자겸 USA중앙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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