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국군포로와 비전향장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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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50년 북한군의 남침을 격퇴하기 위해 19세의 나이에 전선으로 나갔던 육군 일병 전용일(全龍日.72)은 1953년 7월 휴전 직전 최대 격전장이었던 중부전선 교암산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그는 지난 5월 말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 '50년 만의 귀대 장정'에 돌입했다.

국방부.국정원.경찰은 全일병의 탈출과 신원을 확인하고도 두차례나 냉대와 무관심.무성의를 보였다. 그 결과 그는 5개월여의 대륙 유랑 끝에 위조 여권 소지 혐의로 중국 경찰의 철창에 갇혀 있다. 전사자로 처리됐던 국군이 '환생'해 귀대하겠다는데도 국가는 그를 타국의 범죄인 신분으로 전락시켰다. 그러고도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작극까지 벌였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 노력은 빛나는 결실을 보았다. 북한은 1993년 이인모를 판문점에서 넘겨받고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실황을 중계하는 등 영웅으로 대접했다. 평양 시민 30여만명이 그를 환영했다.

김일성은 그를 병문안했고, 부총리급 대우의 저택과 가재도구 및 생활비 일체를 제공했다. 그는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1급도 받았다. 2000년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63명도 냉난방 시설이 갖춰진 60평 규모의 호화 아파트를 제공받는 등 최상급의 예우와 환대를 받기는 이인모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 극단의 대비는 우리를 분노케 하고 질식시키지 않는가. 어느 쪽의 군대가 국민이 자기 체제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고 애국심과 충성심을 더 보이겠는가는 너무 자명하다. 우리를 더욱 절망시키는 것은 국군통수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 국군 지휘계통의 당국자들이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귀에는 이 비극적 전쟁영웅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불법체류 중인 중국동포들의 농성장에 나타났던 대통령은 왜 국가책임의 방기 및 국기문란 상태를 외면하고 있는가. 하긴 그런 물음은 부질없을지 모른다. 서해교전 전사자의 유족들에게 위로전화조차 안했던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 그 영결식에 조문조차 안했던 국군 지휘계통의 최고 요인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이것이 국군 지휘계통에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이 돼야 하나.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전향 장기수마저 북송하자고 촉구하는 인권운동가들, 인권과 평화의 현안마다 얼굴을 내밀며 정의.사랑.연대를 외치는 그 수많은 원로.성직자.시민운동가는 다 어디서 무얼 하는가. 장기수의 북송 당시 꽃다발을 증정했던 김동신 전 육군참모총장은 어디로 숨어버렸는가. 나라를 지키는 것만큼 더 고귀하고 숭고한 사명이 있는가. 그 사명을 완수하려다 적군의 포로가 된 국군이 제발로 귀대하려는 것조차 국가가 방기했는데도 그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가.

오늘의 번영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희생이라는 터전 위에서 가능했다. 지금까지 국군포로 32명만 귀환했다. 대부분 자력이었다. 대접도, 관심도 변변히 못 받았다. 아직도 북한에는 국군포로 5백여명이 생존해 있다. 그들은 철저한 무관심의 영역에 있다. 이 수치스러운 구조를 어떻게 깨야 하나. 국회는 국정조사권을 즉각 발동, 全일병 사건과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사례를 조사해야 한다.

그것을 토대로 국군포로 탈출 정황이 포착되면 그를 자동적으로 귀환시키고 정당하게 대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라. 그런 것이 국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정부도 북한의 장기수 송환 집념을 배워야 한다.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하면 북한을 자극한다는 헛된 가설에서 벗어나 그들을 귀환시킬 수 있는 단호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수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