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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왕릉(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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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발해는 우리 국사에서 「후고구려」로 볼수도 있는 묻혀진 역사의 한 장이다. 『구당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부 출신인 대조영이 계루의 옛땅에 발해국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루는 고구려의 왕족을 형성한 부족이름으로 곧 고구려를 뜻한다.
발행이 제2대 무왕은 727년 대사 고인의등 24명을 일본에 파견,수교를 청하는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로 옛나라를 광복했고 부여의 유속을 지킨다」고 밝히고 있다. 제3대 문왕 역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고구려국왕」이라 칭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지금까지 발굴된 발해유물들이 고구려 양식이다.
발해 오경의 하나였던 동경 용원부 유지발굴에서 출토된 이불병좌석상이나 상경 용천부에서 발굴된 소형전불 모두가 고구려 불상양식이다.
발해의 영토였던 중국 길림성 및 소련 연해주 일대와 두만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동경·전사상·청동제관사상 등의 발해유물들도 대체로 고구려의 조형미술 양식과 일치한다.
이밖의 중요 발해유적발굴로는 제3대 문왕의 딸들인 정혜·정효 공주의 묘가 각각 1949년 만주 동모산(현육정산)과 1981년 서고성자부근에서 발굴돼 출토된 비문과 부장품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고구려 멸망 10년후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699∼926년)는 14대 227년을 지속한 강대한 자주독립 왕국이었다.
건국당시에는 국호를 「제는 진에서 나온다」는 『주역』의 가르침을 따라 진이라했다가 713년 발해로 개칭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독창적인 문자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토가 전성기에는 만주 동북부·연해주·한반도북부에 걸쳐 5경15부62주 방5천리에 달했다.
「발해의 남자는 지혜와 용맹심이 뛰어나 세사람만 있으면 호랑이도 이겨낸다」는 말까지 듣던 발해였지만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합쳐진 민족구성의 혼합에서 오는 갈등 등으로 그 용맹도 발휘해보지 못한채 계단에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사는 자고로 동양사학계에서 가장 이론이 많은 부분이다. 우선 『구당서』가 건국자를 고구려계로 기록한데 반해 『신당서』는 말갈계로 보고 있어 그 역사의 주인공부터가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일연의 『삼국유사』,이승휴의 『제왕운기』등이 발해를 다뤘고 조선조의 유득공은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조시대로하는 역사기술체계의 개편을 강력히 주장한바 있다.
최근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에서 발해왕릉이 발굴돼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왕릉에는 고구려 벽화고분과 같은 정교한 벽화들이 선명하다고 한다.
영안은 바로 발해왕조의 1백70여년간 왕도였던 상경 용천부다. 발해역사의 연구와 국사편입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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