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첫단추 잘 끼워야/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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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야 정당의 14대총선 공천작업이 임박했다. 현행 제도가 바람직하느냐 않느냐를 떠나 공천은 정당이 정치판을 짜는 첫 단추고 출마자에겐 당선의 지름길이라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관문이다.
때문에 공천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수준과 실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장바닥이나 다름없다. 온갖 흥정·모략·음모·공략이 난무하는 가운데 거래가 형성된다. 장사를 잘하는 정당은 4년간 큰소리치며 국정을 요리할 수 있지만 잘못한 정당은 죽을 쑤며 4년을 기다려야 한다.
○여당의 쓰라린 경험
공천의 성패여하에 따라 정치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는 13대총선때 민정당 공천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내내 허리를 못펴고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바로 공천실패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소야대에 시달리다 3당통합을 했으나 한번 잘못 낀 단추는 아직도 매무새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대권싸움이다,뭐다해서 통합 자체가 또다른 시비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1노3김의 경쟁에서 여유있게 이긴 노대통령은 당시 야당분열에 방심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공천을 해도 총선까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때문에 자신에게 버거운 5공핵심부터 창조적 단절이란 명분아래 공천에서 탈락시켜 세력재편을 시도했었다. 대신 5공때부터 여권주변을 맴돌던 신인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그것도 월계수회란 자신의 사조직을 통해 재력중심으로 모았다. 선발과정은 대부분 핵심측근에 의해 밀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민정당의 참패로 끝났다.
이제 노대통령은 13대때의 쓰라린 경험과 3계파가 공존하는 새로운 역관계를 바탕으로 공천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인물본위니,당선가능성이니 도덕성·전문성 등을 기준으로 내세우지만 결과는 어떤 모습을 그릴지 누구도 짐작하기가쉽지 않다. 계파지분을 인정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골고루 확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지 모른다.
공천기준이야 나중에 꿰맞출 요량으로 부작용이나 덜내고 3파공존의 축만 흔들리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것이 민자당 지도부의 속셈이 아닌가 싶다. 그러자면 실현가능한 방안은 무엇인가.
모르긴 해도 가급적 분란의 소지를 줄이자는 쪽으로 기준이 타협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정치권타락과 질저하의 첫째 요인으로 지적되는 금권주의배제를 겉으로 내걸고 파벌간 지분을 인정하면서 현저한 불공평을 없애자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우리 정치에 파고드는 금력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지방의회선거에서 이미 나타났다시피 공천과 선거운동이 모두 돈의 지배를 받는 현실은 개탄을 넘어 우려할 지경이다. 이대로 가다간 땅부자나 노멘클라투라(특권 권력계층)가 아닌 사람은 정치권 진입이 거의 불가능할지 모른다. 잘 훈련된 전문가나 의식있는 젊은이들이 정치의 문턱에서 좌절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다.
3계파가 철저히 나눠먹기식으로 공천하다간 민자당의 합당목표는 영영 사라져버릴지 모른다. 지분의 범위에서 인물본위로 선발한다는 것은 말장난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일이 되려면 우선 노대통령과 김영삼 대표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두 사람이 진실로 의회개혁을 통해 정치발전을 이룰 생각이 있다면 노대통령은 퇴임후의 위상에서,김대표는 계파이익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지분이 정치발전으로 연결된다.
○나눠먹기식은 곤란
현 단계에선 누구도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지만 공천의 민감한 잠복성 이슈로 대통령의 친·인척문제가 있다. 알다시피 지금 노대통령의 처남(김복동)·동서(금진호)·처고종(박철언)은 민자당 공천을 전제로 지역구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셋중 두명은 지난 선거에 출마하려다가 친·인척배제란 대통령의 공약을 지키기위해 포기했고 한명은 전국구로 의원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중 과연 몇명이 공천받을 것인지,대통령의 친·인척배제 공약이 이번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이들을 모두 공천해도 당내에 반발이 없을 것인지,이들의 사전선거운동 잡음은 문제가 되지않는 것인지…. 모두가 깊은 관심의 대상이다.
민자당의 사정에 비해 민주당에서 예상되는 공천시비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전통적으로 인물난·자금난을 겪고 있는 야당에는 지역구나 전국구의 공천이 여당보다 더 금력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후유증도 대개 그런 범주에서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벌써 전국구공천의 가격흥정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으며 호남과 서울에서는 물갈이가 「돈갈이」로 변질될 것이라느니,영남지역에서는 바겐세일이 있을 것 같다는 얘기도 들린다.
민주당은 이같은 한계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수권가능성이 달려있다. 현금액수와 인재의 자질을 조정하고,지역성에 매달리지 않는 전국적 명망가를 영입하는 작업은 무척 힘들 것이 틀림없다.
○물갈이 대신 「돈갈이」
이런 문제점과 난맥을 안고 있음에도 공천제도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공천이 당락에 미치는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분명 당내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부작용을 빚고 있다. 정당에서 당원을 제치고 당지도부와 지망자간에 하향식으로 공천이 변칙거래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할 과제다. 의원의 저질화를 부추기는 결과도 무시할 수 없다.
정치가 공천권행사란 장치를 통해 소수에 의해 독과점되고,돈과 권력의 연줄이 유효한 접근수단이 되는 풍토에서는 권위주의의 음모정치가 쇄신되길 기대하기 어렵다. 정당 지도자들이 개선의지는 커녕 타성에 젖어 공천권행사를 즐기는한 우리 정치의 수준은 늘 이상태에서 머무를 것이란 얘기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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