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5판 내리 역전 드라마 이민진 '광저우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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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명선수 이민진 5단(左)이 여자 바둑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민진은 15일 대회 최종국에서 일본의 여자본인방 야시로 구미코 5단을 꺾고 5연승과 함께 정관장배를 손에 쥐었다.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한국의'숨은 전사'이민진 5단이 기적을 연출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파죽의 5연승으로 한국팀에 정관장배를 안겨준 것이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여겼고 그래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가운데 한국의 마지막 선수로 나섰던 이민진은 하나하나 승리를 쌓아갔고 기어이 15일 일본 주장이자 여자 본인방인 야시로 구미코 5단에게 백으로 6집반 승을 거두며 대역전 우승의 기적을 일궈냈다. 2005년 이창호 9단이 농심신라면배에서 한국의 마지막 선수로 나가 5연승으로 우승을 만들었던 그때의 신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우승을 확정지은 이민진 5단은 환한 얼굴로 "꿈만 같다"고 말했다.

과정은 험난했다. 결정적인 비세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대마 몰살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연이은 대국의 중압감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민진은 불 같은 투혼과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섯 판 모두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 냈다.

이민진 5단이 없었다면 한국은 대회 최종 라운드가 열린 광저우에 가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최강전은 한.중.일 3국의 여자 대표기사 5명이 연승전으로 맞붙는 단체전. 한국은 이하진 2단, 김혜민 4단, 현미진 4단에 이어 팀의 중추인 박지은 6단마저 줄줄이 탈락했고 대회는 일찌감치 일본 대 중국 양자대결로 흘러갔다. 한국의 마지막 선수 이민진은 그러나 서울에서 열린 2라운드 마지막 대국에서 일본의 가토 게이코 5단에게 역전승을 거두고 일단 불씨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광저우로 무대를 옮긴 정관장배는 12일 이민진 5단 대 중국 4장 리춘화 5단의 대국을 시작으로 최종 라운드의 막을 올렸다. 이민진은 끈질긴 추격으로 대불리의 형세를 뒤집어 1집반 승리를 거뒀다. 가장 힘들었던 두 번째 역전승이었다.

13일 일본의 고니시 가쓰코 8단과의 대결에선 천운이 따라주었다. 대마의 사활이 승부였는데 고니시 8단은 훤히 내다보이는 삶의 길을 외면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왔다. 세 번째 역전승.

14일 중국의 예구이 5단과의 대결은 처음부터 판이 꼬이며 양 대마가 동시에 쫓기는 참담한 고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전투의 화신으로 변한 이민진은 역습에 역습을 거듭하더니 9집반 대승. 믿을 수 없는 네 번째 역전극이었다.

마지막 대결은 의외로 수월했다. 이판 역시 초반은 나빴으나 이민진의 폭풍질주에 놀란 듯 일본의 강자 야시로 구미코 5단은 중반 대마를 죽이며 연전에 지친 이민진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84년 서울생인 이민진 5단은 99년 프로가 됐다. 그동안 조혜연 7단, 박지은 6단 등에 가려 올해 정관장배 대표로 선발된 것 말고는 뚜렷이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다. 이번 5연승 우승이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이유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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