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스타탄생인가 영웅부활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것이다. 승부에 대한 집착은 갖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둘 것이고 결과는 나중이다. 운이 따르면 이기는 것이고 운이 따르지 않으면 지는 것 아닌가."(조치훈9단) "존경하는 조치훈 사범님과 결승전을 두게 돼 영광이다. 이왕 결승까지 온 이상 꼭 우승하고 싶다."(박영훈4단)

조치훈9단과 박영훈4단이 맞서는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3번기가 오는 8~11일 대구 영남대에서 열린다.

2003년도의 대미를 장식할 이 결승전 우승상금은 2억원. 18세의 박영훈4단은 세계대회 첫 결승무대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앞으로 펼쳐질 길고 긴 승부의 여정에 탄탄대로를 마련하려 한다.

반면 47세의 조치훈9단은 승부사로서 마지막 불꽃을 사르는 기분으로 이번 결승전에 나선다. 본인의 표현대로 집착을 버린 지는 오래 됐다. 조치훈9단도 이제는 황혼 녘이고 영광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그러나 이번 예기치 않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해 딱 한번 부활의 기분을 맛보고 싶다.

사실 이번 대회에 조치훈9단과 박영훈4단이 기라성 같은 강자들을 모두 제치고 결승에 오르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적어도 전문가 중엔 아무도 없다. 조치훈9단은 바둑사에 다시 쓰기 힘든 빛나는 기록과 업적을 남겼으나 근래에는 세계대회에서 초반 탈락이 예사였다.

박영훈4단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신예고, 이미 국내 기전인 천원전에서 한차례 우승 경험도 갖고 있지만 아직은 어리고 큰 승부의 경험도 부족해 꽉 짜인 맛이 없었다. 이창호9단이나 이세돌9단 같은 강자들과 비교할 때 아직은 덜 익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두사람은 우승컵을 다투게 됐고 쌍방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조9단의 말 그대로 운이 있으면 이기고 운이 없으면 지는 그런 승부다.박영훈4단이 이기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것이고 조치훈9단이 이기면 영웅이 부활하는 것이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 타이젬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네티즌들은 박영훈이 승리할 가능성을 더 크게 보고 있다. 총 응답자의 67.4%가 박영훈의 우승을, 32.6%가 조치훈의 우승을 각각 점쳤다. 지는 해보다는 떠오르는 해가 믿음직스러운 것은 인지상정이며 전문가들도 간발의 차로 박영훈의 우세를 내다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 내내 조치훈9단이 보여준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다른 어떤 후배들보다 먼저 대국장에 나타나 바둑판 앞에서 오랜 시간 홀로 묵상을 하곤 했다. 마지막 전쟁에 나서는 장수처럼 그는 정성을 다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박영훈에게 유리한 분위기라지만 그래서 이번 승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오직 대국을 지켜보는 일뿐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