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일방적 요구에 굴복한 정부 '현금 금지' 원칙 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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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건설을 재개키로 합의한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공사 현장. 지난해 7월 5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정부가 대북 지원을 중단하자 북측이 일방적으로 남측의 공사 인력을 철수시켰다. [연합뉴스]

북한에 대한 현금 지원은 안 된다는 정부의 원칙이 무너졌다. 10일 끝난 남북적십자 실무접촉에서 정부가 북한에 이달 중 40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원키로 처음 합의해줬기 때문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될 우려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뤄진 달러 지원이기에 논란은 불가피해졌다.

또 이산 상봉을 빌미로 현금.물자 챙기기에 나선 북한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돈 쓴 명세 통보하겠다지만…=북한이 이산 상봉 재개와 관련해 이번 실무접촉에서 챙긴 가치는 우리 돈으로 35억원어치다. 이 가운데 현금 40만 달러(약 3억8000만원)는 화상상봉에 필요한 장비를 사는 데 쓰겠다고 북측은 밝혔다. 돈을 쓴 명세를 남측에 통보하고 남측에서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북한에 현금이 건네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만만치 않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사후 모니터링으로 달러의 쓰임새를 꼼꼼히 따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정부가 현금 지원으로 돌아선 데 따른 파장이 클 전망이다. 정부는 금강산 관광 대가와 개성공단 내 북측 근로자 임금 지급 등 경협 차원의 달러 제공 외에는 사실상 대북 자금 유입을 금지해 왔다. 방북 공연에 따른 대북 커미션 등 불가피할 경우에는 현물로 주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정부가 북한에 현금을 건넴으로써 이런 원칙을 민간 부문에 요구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북한이 이산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을 볼모로 대북 지원 챙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는 관측도 있다.

40만 달러 중 상당부분을 버스 10대와 승용차 6대를 사는 데 쓰겠다는 게 북한 측 계획이다. 이산가족 행사 진행이나 생사.주소 확인 작업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예 평양 화상상봉센터 신축에 필요한 자재.장비와 물품을 모두 보내 달라고 요구해 관철하기도 했다. 굴착기와 화물차 등 건설장비와 시멘트.철근 같은 자재 외에 에어컨과 변기, 전선과 케이블까지 31억여원에 달하는 물품이 요구품목에 들어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이산상봉의 절차 문제 등 실무작업보다는 최신식 상봉센터 건립에 더 열을 올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대북 현금.물자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산상봉의 안정적 진행을 위한 보장장치는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 본질적 문제 해결을 북한과 협상하기보다 북한의 지원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전략 물자 중국 통해 마련하라"=북한에 대한 물자지원은 미국의 수출관리규정(EAR) 등 국제 사회의 전략물자 통제규정에 따라야 한다. 정부는 개성공단 입주기업 등에 대해서는 미 상무부의 수출허가와 통일부의 대북 반출승인을 받도록 엄격히 규정해 놓았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이 요구한 대형 LCD 모니터와 컴퓨터에 대해서는 "우리가 주기 어려우니 중국 등에서 사서 쓰라"며 그 대금을 대줬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전문가는 "자칫 대북 전략물자 통제와 관련해 미국이나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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