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 무용수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누가 가장 먼저 떠올랐느냐'란 질문에 전화 속 그의 발랄한 목소리는 순간 멈추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어머니 얘기를 했다.
발레리나 김지영(29)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Dutch National Ballet)에서 활동 중인 그가 마침내 수석 무용수(First Soloists)로 등극했다. 40여 년 역사의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은 90여 명의 단원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이다. 한국인으로 해외 유명 발레단 수석 무용수가 탄생한 것은 강수진(39.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씨에 이어 둘째다.
그에게 '어머니'는 평생 가슴에 멍을 지게 만든 단어다. 1992년 그는 예원을 졸업하고 선진 발레를 익히고자 러시아로 떠났다. 바가노바 발레학교였다. 10대 초반의 예민한 감수성을 꽁꽁 숨긴 채 그는 낯선 땅에서 발레에 전념했고, 4년여의 기간이 지난 96년 6월 드디어 졸업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됐다. 막내딸의 졸업 공연을 보기 위해 어머니도 한국에서 건너왔다.
어머니가 보고 있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했으나 그의 기량은 박수를 받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그를 반갑게 맞아줄 어머니는 객석에 없었다. 함께 온 아버지도, 언니도 안 보였다. 공연 도중 어머니가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만이 전해졌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갔으나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제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갑자기 어머니가 앞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쓰러지셨대요. 심장마비였죠. 잔병도 없이 건강하셨던 분이었는데, 평상시 외지에 떨어진 어린 딸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셨기에…."
"수술도 받고, 눈물 핑 돌 만큼 힘든 재활 훈련을 할 때면 포기하고 싶었죠. 그런데 그때마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곤 했어요. 아마 하늘나라에서나마 제 공연을 보고 싶으셨던 거겠죠."
그의 언니인 김현수씨는 "지영이 일기장을 몰래 훔쳐 보니 '엄마 잘 할게'란 글이 여러 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마음이 짠하던지…"라고 말했다.
김지영씨는 오는 7월 한국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려고요. 벌써 11년이 됐네요. 수석도 됐으니 저도, 어머니도 이젠 좀 편안해져야겠죠."
최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