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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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월남 이상재가 YMCA총무를 할때의 일이다. 한 후배 청년이 섣달 그믐께 문안드리려고 월남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방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청빈하기로 이름난 그는 80평생에 변변한집 한채도 마련하지 못했었다.
청년은 월남의 어려운 살림이 민망스러워 주머니에서 돈 20원을 꺼내 「촌지」로 내놓았다. 『이것으로 우선 시량(땔나무와 쌀)이나 좀 사십시오.』 월남은 『고맙네』하고 그 돈을 받아 방석밑에 넣었다.
잠시후 한 학생이 찾아왔다. 학생은 내일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여비가 없다고 호소했다. 월남은 청년에게서 받은 촌지를 꺼내주면서 『공부나 잘하고 돌아오게』라고 격려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한 후배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선생님! 그 돈을 몽땅 학생한테 주셨으니 시량은 무엇으로 사시렵니까.』『사정을 아는 사람이 또 주겠지.』
월남의 천연스런 대답이었다. 땔나무가 없는 월남의 긴박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바로 촌지를 내놓았던 그 청년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전해지자 결국 그 청년이 약간의 촌지를 더 내놓았다.
촌지란 속으로부터 우러나온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는 자그마한 선물을 뜻하다. 그래서 일명 촌심,또는 촌의라고도 부른다. 촌지는 불교의 포시와 같이 절대 무보상적이며,속마음을 담은 인정의 표시가 그 근본 속성이다.
옛날에도 명절때등에는 사대부집 안방마님들이 하인들에게 촌지를 주었다. 하인들이 오히려 능동적으로 마님한테 『인정좀 주십시오』라고 촌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의 촌지는 쌀 몇되박,동전 몇닢 정도였다. 궁중에서는 설때가 되면 서울과 지방의 조관 및 명부들에게 쌀·고기·소금 등을 촌지로 내려주기도 했다.
양속의 촌지관행은 시대를 내려오면서 뇌물의 성격으로 변질되고 그 이름도 미성·미의·미충·세찬 등으로 다양해졌다. 돈을 봉투에 넣어 촌지라고 주는 풍습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5·16이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같은 촌지 풍습은 마침내 경제개발 지상의 물질만능풍조와 어우러지면서 사회부패구조의 한 단면으로 굳혀졌다. 이제 양속의 촌지관행은 거의 사라지고 악습의 부패가 돼버렸다.
언론계 일각의 최근 촌지사건도 직업윤리를 배반한 부패라는 점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고있다. 언론계 촌지의 악습을 뿌리뽑는 언론인들 스스로의 철저한 실천적 의지가 있어야겠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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