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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늦기전에 우리분수를 찾자(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정부와 국민,이렇게 일하고 이렇게 써도 되는가
우리 경제의 이모저모를 아무리 뜯어봐도 나라의 운세가 기울고 있다는 판단을 바꿀 수가 없다. 경제난의 본질인 산업경쟁력의 위기에 대한 경고와 개탄만 되풀이 될뿐 이를 타개할 국민적 에너지의 동원과 세의의 결집은 한없이 지연되고 있다. 일터를 메워야 할 열기는 아직도 과소비와 행락의 현장에 가득 차있다.
「대외경쟁력에 있어서 한국인은 절벽 끝에 서서 절벽 끝인 줄도 모르고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일본언론인의 지적이다. 옳은 말이다. 세계의 주력시장에서 우리 산업의 대표상품들이 계속 밀려나고 국내에서 조차 야금야금 시장을 잠식 당하고 있다. 지난주 부산에 있는 신발끈 제조업체의 한 경영자가 제품의 판로를 잃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는 보도는 사실 그 자체로서보다,그것이 지니는 상징성으로 인해 더 큰 충격을 던져준다.
수출전선에서의 퇴각이 계속되면 우리는 살아남을 길이 없는 것이다.
경제전쟁의 가열화를 예고하는 바깥 정세의 변화가 거칠게 전개되고 경쟁력의 쇠잔을 증명하는 현상들이 눈앞에 질펀한데도 먹고 쓰고 노는 판을 우리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비의 단물에 탐닉하는 모습은 여전히 우리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이 추한 그림에 외국언론이 붙여준 제목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국민」으로 돼 있다.
샴페인을 터뜨리는 소리는 이 가을에도 요란하다. 명산과 온천의 숙박업소마다 주말객실은 동이 나고 관광업체의 전세버스를 전부 동원하고도 모자라 예비군 수송차량과 자가용버스까지 관광객 수송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공장의 인력난이 심각해 질수록 관광지의 인파는 불어난다.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의 비좁은 도로에 수출품을 싣고 항구로 가는 트럭과 나들이의 자가용이 함께 발이 묶여 서있는 광경에 우리 모두가 태연해도 되는가.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의 거리에 자동차가 넘쳐 밀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부국이라고 얘기해야 할 것인가.
불건전하고 비합리적인 소비지출의 관행은 우리의 생활문화속에 넓고 깊게 뿌리박고 있다. 값비싼 외식,수백만원짜리의 의복,수천만원짜리의 가구,흥청거리는 환락가의 풍물은 일그러진 소비사회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팁으로 뿌리는 돈과 경조금·선물·회비·찬조금·촌지의 단위가 터무니없이 높아지고 어린학생들에게 주는 부모의 용돈도 예사롭지 않다. 멀쩡한 옷가지들과 조금만 손보면 쓸 수 있는 가구들이 아파트촌의 쓰레기장에 즐비하다.
아래 위를 가릴 것 없이 번져나가는 자기과시형과 한풀이식 소비에다 집장만의 꿈을 날려 버린 자포자기형 소비,한 평이라도 더 큰 집을 선호하는 자산증식형 소비,청탁·접대용 지출,호화판 해외여행등이 한데 어우러져 경제난과 사회악은 끝없이 깊어만 간다.
정부의 돈 쓰는 품에도 절제와는 거리가 멀고 우선순위에도 맞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유엔가입때의 대규모 사절단 파견은 민간부문의 자기과시형 소비와 맥락을 같이 한다. 대전 엑스포행사·경부고속전철계획·올림픽3주년 기념행사·주택 2백만호 건설 등은 설령 그 부분적인 타당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축제형 또는 기념비형 사업에 연연하는 정부의 공적 과시욕을 드러낸 것들이다.
사회전체가 과소비로 들떠있는 가운데 사회의 한부분인 일터만이 차분하게 남아있을 턱이 없다. 과거 오랫동안 노동규율을 지탱시켜준 강권의 통제가 빠져나간후 자율과 평등계약에 의거한 노동질서가 정착되지 않은채 과도기의 진통은 좀체 끝나지 않는다. 국운이 뻗쳐 오르던 시절에 모험과 도전의 기백으로 충만했던 기업가 정신에도 군데군데 흠집이 나있다. 새 시장과 새 기술의 개발의욕이 전반적으로 움츠러들고 부동산 투기와 재테크에 열중하는 일부 기업인들에 대한 비난이 그칠 새가 없다.
관가의 일하는 모양이 예같지 않다는 지적도 자주 들린다. 정책결정의 실기와 우유부단,그리고 갈팡질팡하는 정책추진의 사례들이 한둘이 아니다. 소신과 책임감으로 일을 추진하기 보다는 몸 다치지 않는 선 안에 안주하려는 자세가 국민의 빈축을 사고 있다.
일에는 염이 없고 쓰고 노는데 정신이 빠져 있는 사회가 오래 버틸 수는 없다. 대외적자,고물가,고임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길은 소비의 절제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경쟁력 기반의 재구축에 필요한 새로운 결의도 소비의 열풍을 잠재운 뒤라야 솟아날 수 있다.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이제 우리 모두 분수를 지키자. 오늘 일하고 내일 쓰겠다는 의식전환이 있어야 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민족에 내일이 열릴 까닭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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