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경성야화(61)|학도병 징집|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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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총독부당국은 조선에서 학병의 성적이 나쁘면 민심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학생의 부모를 잡아들여 아들을 내보내라고 협박하는가 하면 아들이 응낙할 때까지 가둬두는 등 갖은 수단을 다 써가면서 학병의 숫자를 채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있기도 하고 칼로 손가락을 잘라 신체검사에 합격되지 않게 하기도하여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당시의 일본국회 기록을 보면 『조선인 학생 속에 반전사상·반일사상을 가진 자가 많고,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학생이 많아 학병성적이 좋지 않다』는 구절이 나와 있다.
이 무렵 일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는 1943년 9월8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고, 소련군은 스몰렌스크에서 격전 끝에 나치군을 무찔러 이 부근 일대를 탈환했고, 일본군은 과달카날 도에서 철수하는 등 전세는 일본과 독일에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이에 초조해진 일본군부는 마지막 발악으로 국민들을 들볶으면서 학병징집에 광분했다.
또 윤치호·이광수 등 국내 저명인사들은 11월 보름께 부민관에서 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장래를 위해 학병으로 나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때 한 경성제대학생은 이들을 향해 이와 반대되는 연설을 하여서 그들을 무색하게 만든 일까지 있었다.
학병 징집자들은 12월에 경성제대 운동장에서 훈련을 받고 이듬해인 44년 2월20 일제히 진지로 출발했다.
부민관에서 장행회가 있었는데 총독이 연설하는 도중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질문했다.
『우리가 학병으로 전쟁터에 나간 다음 우리 민족에 자치권을 줄 것을 보장하느냐?』
이것은 4천여 학병을 대변해서 외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병으로 끌려나간 학생 중에는 중국대륙에서 결사적으로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해 중경의 국민정부나 연안의 공산군측으로 가담한 학생이 많았다.
학병징집을 최후까지 거부한 학생들은 결국 징용에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정신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해서 혹독한 강 훈련에 툭하면 매질을 당했다.
이때 지원병 훈련소에서 1백20명 가량이 교육을 받고 황해도와 함경도에 있는 시멘트공장으로 배치되었다. 그 당시 시멘트공장에는 분진이 심해 들어가면 폐결핵에 걸려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몇 학생이 해주에 있는 오노다 시멘트공장에서 일하다 분진을 마시고 쓰러진 일이 있었다.
여기서 그 당시의 생활상과 민심의 동향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42년8월 미군의 과달카날섬 상륙 이후 전세가 점점 불리해져 몰리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강압정치는 극에 달하게 됐다.
창씨개명, 조선어금지, 금·은·쇠붙이 징발, 징용, 민간신문폐간, 학병 징집 등 당시 일본군부의 포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의 민심은 우리의 원수 일본이 어서 어서 망하기를 바랐다.
일본이 패전하는 것은 우리의 독립이 실현되는 것으로 하늘에 미국 비행기 B-29가 나타나면 피해 방공호로 들어가기는커녕 좋아라 하늘을 쳐다보고 웃을 지경이었다.
B-29는 일본에 날아와서 소이탄을 비오듯이 떨어뜨려 동경을 불바다로 만들었지만 서울에 나타나서는 천천히 빙빙 돌다 가버려 아무 피해도 없었다.
아래에서 쓸데없이 고사포를 쏘아댔으나 중간쯤 올라가서는 제풀에 터지고 말았다. 조선인들은 이 광경을 보며 저것 보라고 웃어댔다.
그러나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만 갔다. 쌀·고기·빨랫비누·술·고무신 등 일상용품이 없어 쩔쩔매는 생활이 계속됐다. 부인네들은 방공훈련이니, 배급이니, 누가 입영하니 나오라는 등 이런 일 저런 일로 불러내는 통에 몸빼 바람에 밤낮 없이 밖에 나가 살았다.
또 조금만 게으르게 굴면 비 국민이니, 배급을 안 주느니 하며 협박했고 그렇다고 부지런히 굴어도 배고프긴 마찬가지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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