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집단농장 '키부츠' 사유화 바람에 사라져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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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스라엘의 집단농장 '키부츠'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1910년 세워진 이스라엘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가 사유화를 결정해 이스라엘인을 놀라게 했다. 투표 결과 회원 220명 중 85%가 사유화에 찬성표를 던졌다.

키부츠 안에서 모든 재산은 공동 소유며, 소속원이 번 돈은 공동 계좌로 입금해 가족 수에 따라 나눈다. 사유화란 소속원들이 벌어들인 돈을 각 개인 계좌에서 스스로 관리하며, 키부츠 밖에 있는 산업체에서 일하고 받은 돈도 개별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하루 1시간을 일하든 8시간을 일하든 가족 수에 따라 받던 임금도 일한 성과에 따라 달라진다.

◆사라지는 키부츠=미국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키부츠의 종말은 사회주의적 운영 방식의 효용이 준 데다 집단 생활에 대한 회의가 늘어난 것이 큰 이유라고 최근 보도했다. 소속원의 투표로 사유화 전환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집단 농장 '가쉬'의 하난 로갈린 농장장은 "성과에 기반하지 않는 동일 임금, 집단 생활 같은 키부츠의 특징에 소속원들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70여 키부츠 중 180곳이 노동 시간에 상관없이 동일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포기했고, 25곳은 일을 잘하면 임금을 더 주는 인센티브제를 도입했다.

키부츠는 사회주의적 원칙, 뛰어난 교육 제도, 집단 생활로 유대인의 시오니즘 이상을 구현하는 훌륭한 모델로 여겨져 왔다. 미국과 유럽에서 귀국한 많은 지식인이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키부츠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키부츠들은 이스라엘 농림부로부터 어떤 작물을 재배할지 구체적으로 지시받았다. 이곳에서 교육받고 자란 세대들이 이스라엘 군과 정치 부문에서 요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85년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취한 각종 조치로 키부츠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경영난을 겪고, 은행 빚에 쪼들리는 키부츠가 늘어난 것이다.

영국 BBC 방송은 "어떤 일을 하든 똑같은 임금을 받는 집단농장 체제가 자본주의화한 이스라엘 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오니즘의 쇠퇴와 개인 생활을 무시하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회의도 큰 몫을 했다. 2세들이 자라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면 키부츠를 떠났다. 여러 가지 이유로 최근 20년 새 전체 키부츠 거주 인구 중 4분의 1이 집단 농장을 빠져나갔다.

◆남은 키부츠도 진화 중=사유화를 택하지 않은 키부츠들도 전통적인 개념과 매우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에 중요시되던 '평등'보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키부츠들은 농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산업 분야로도 진출하고 있다. 구성원 대다수는 키부츠 밖의 기업에서도 일하는 이른바 '투잡족'이다. 매끼 식사를 제공하던 공동 식당에서는 요즘은 점심만 제공하며, 소속원 중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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