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노동력, 세금 혜택 옛말 … 기업 넷 중 한 곳 이미 적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1994년부터 투자한 돈이 200억원을 넘지만 지금은 공장을 팔아서 20억원만 건져도 좋겠다."

중국 베이징(北京) 교외 공단 지역에 있는 기호피혁 김영덕 총경리(사장)의 하소연이다. 그는 2월 7일 현장을 찾은 기자에게 "피혁은 한국에서 경쟁력을 잃어 중국으로 왔는데, 이젠 중국에서도 환경 문제로 경계하는 산업이 돼 갈 곳이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2005년만 해도 40여 개 남아 있던 한국 기업이 1년 새 15개로 줄어들었다." 봉제.전자부품 업체들이 대거 몰려갔던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에서 한국상공회를 이끌고 있는 이한성 회장의 말이다. 그는 "인력난으로 공장 가동률이 60~70%도 되지 않는 데다 중국 당국의 정책이 수시로 바뀌면서 적자를 못 이겨 철수하는 업체가 속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을 '샌드위치 신세'로 몰아붙이고 있는 중국에서 한국 기업들이 밀려나고 있다. 특히 돈과 기술력을 갖춘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들은 급격히 경쟁력을 잃고 있다.

한.중 수교(92년) 15주년, 한국 기업의 첫 중국 직접투자(88년) 20년째를 맞아 중앙일보와 한국무역협회가 공동으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실태를 취재한 결과 이런 현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중국에 진출한 177개 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무역협회 조사에 따르면 기업 넷 중 하나(26.4%)는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 변화로 이미 적자를 보고 있다고 응답했다. 기업 셋 중 하나(33.6%)는 경영환경이 1~2년 전보다 악화됐다고 답했다.

중국은 급속히 변하고 있다. 공장만 세우겠다면 양팔 벌려 환영하던 중국은 '어제의 중국'이다. 중국 정부는 외국인 투자 기업에 주었던 세금 감면 혜택을 줄이고, 지방정부들이 공장부지 염가 제공 등의 특혜를 주는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경상수지 흑자로 돈이 넘쳐나면서 외국인 투자의 필요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값싼 노동력을 노리고 중국에 들어간 중소기업들의 경우 인건비가 매년 10% 이상 치솟는 데다 노사분규까지 늘어나면서 직격탄을 맞고 있다.

KOTRA 베이징무역관 이종일 관장은 "주로 가공무역이나 노동력에 의존하던 한국 중소기업들 상당수가 이미 베트남 등 제3국으로 이전했거나 이전 또는 폐업 준비를 하고 있다"며 "5월께 개성공단 설명회를 열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업체들의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까지 우리나라 기업의 대중 투자(실행 기준) 1만5909건 중 대기업이 733건, 중소기업이 9650건이다. 전체 투자금액(170억 달러) 중 대기업 비중은 51.3%(87억 달러), 중소기업 42.7%(73억 달러)다. 우리 기업의 대중 투자 평균금액은 107만 달러로, 해외투자 평균액(208만 달러)의 절반 수준이다. 규모가 작은 기업들의 투자가 많은 만큼 중국 내에서의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중국에서 이대로 밀려난다면 '샌드위치 코리아'는 극복할 수 없다. 12억 인구에 매년 경제성장률이 9~10%에 이르는 중국은 세계 최대의 성장 시장이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박승호 중국 삼성경제연구원장은 "이젠 막연한 생각으로 과감하게 투자하는 '몽상가형' 중국 투자는 안 된다"며 "다국적 기업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첨단기술과 마케팅 기법, 중국 토종업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현지화 전략으로 무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중앙일보=양선희(팀장).권혁주 기자(경제부문)

한국무역협회=송창의 중국팀장, 이승신 무역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샌드위치 코리아=미.중.러.일 주변 강국에 끼여 한국이 샌드위치 신세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이 화두를 잡고 올해 내내 경보음을 울리겠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