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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선관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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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2층 국제회의실. 전국에서 모인 500여 명의 전국조합.지방조합.사업조합 이사장들이 빽빽이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회장 선거에 출마한 5명의 후보자가 하나같이 열변을 토했다.

중기중앙회는 1988년부터 회원 조합장의 직접 선거로 회장을 뽑아왔지만 선거 때마다 불법선거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다. 예전에 선거인단이 200여 개 조합 이사장들로 제한돼 있다 보니 선거인단을 매수하거나 금품.향응을 제공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전임 회장을 뽑았던 2004년 중앙회장 선거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법 선거 의혹이 제기되면서 당선자를 비롯해 당시 출마했던 후보자 6명 전원과 선거참모.선거운동원 등 51명이 경찰에 입건돼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과거와는 딴판이었다. 중앙회가 사상 처음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를 맡겼기 때문이다. 민간 경제단체의 선거에 정부기관이 개입하면 자율성이 침해될 수 있다는 반대도 일부 있었지만 그보다 선거로 인한 갈등과 후유증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더 컸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김기문 신임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지방에서 열리는 공식 행사에 가는 도중 선관위 직원 전화를 받고 발길을 되돌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선관위가 적발한 위법 행위는 경고 1건, 주의 3건에 불과했다. 최병호(48.도봉구 선관위 사무국장) 단속본부장은 "과거에는 '중앙회장 선거 때만 되면 여의도가 들썩거린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향응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조용했다"고 했다.

중기중앙회처럼 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를 맡기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선관위가 외부의 선거를 대신 맡아 치른 선거 건수는 ▶2004년 6건 ▶2005년 264건 ▶2006년 533건으로 크게 늘고 있다. 올 들어 2월 말까지 위탁선거만 22건에 달한다. 농협.축협.수협.산림조합 등의 조합장 선거 위탁이 768건으로 대부분이지만 대학총장 선거도 19건이나 된다. 심지어 선관위는 주주총회나 아파트 대표자 선거에도 출동했다. 선관위는 2006년 1월에 오향관광개발의 주주총회를 위임받았다. 주주들 간의 경영권 분쟁이 생기자 법원이 제3의 공정한 기관에 주총 관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올 1월에는 충남 천안의 한 아파트 동대표 선거를 위탁받기도 했다.

공공단체나 민간의 위탁선거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중앙선관위는 지난해 1월 위탁선거과를 별도로 개설했다. 정훈교 선관위 위탁선거과장은 "공직선거에서 공명 선거 분위기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생활 주변 선거를 정화할 필요가 있다"며 "사회 구석구석에 민주 시민교육을 확장시켜야 공명선거 기반도 유지된다"고 말했다. 최병호 단속본부장은 "위탁관리는 아니지만 선거 교육을 위해 초등학교 반장 선거 현장에까지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선관위가 기업의 서비스 마인드를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위탁관리는 민간의 선거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이번 중기중앙회 선거의 경우 선관위가 예상 경비로 받은 9239만원 가운데 선관위가 실제 경비로 사용한 금액은 3600만원가량에 불과했다. 선관위는 실제 지출된 경비를 제외하고 나중에 정산해 이자까지 돌려준다.

고려대 장영수(법학) 교수는 "선거는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므로 대표자 선정 기준, 방법, 자격 요건 등을 스스로 정하는 게 원칙이지만 소규모 집단의 경우 전문성이 부족해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선거의 중립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해야 하는 부분까지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선거 위탁관리=2004년 농업협동조합법 등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공공단체의 선관위 위탁관리가 크게 늘었다. 선관위에 선거를 위탁할 수 있도록 각각의 소관 법률을 개정해야 위탁관리를 할 수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도 지난해 4월 중소기업협동조합법을 개정해 회장 선거를 선관위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넣었다.

서경호.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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