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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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최장집(64.고려대 정치외교학.사진) 교수가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실패'를 비판하는 글을 또 발표했다. 계간지 '비평' 봄호에 실릴 논문 '정치적 민주화: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다.

노무현 정부가 풀기 어려운 이념 문제에 치우쳐 정작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말로만' 개혁을 외칠 뿐 실제 정책은 보수적이었다고 진단한 내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 교수를 비판했던 청와대 브리핑(2월 17일)에 대한 직접적 반론은 아니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최 교수는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과제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 정리한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최우선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당체제의 제도화'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노동 및 복지 문제 해결)'다. 최 교수는 민주화의 성과로 잇따라 등장한 집권 세력이 두 가지 모두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발전의 과제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이익과 요구를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 혹은 정당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한국의 정당체제는 50년대 형성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인물을 중심으로 정치가 진행되는 현상을 우려했다. "대통령을 선출한 사람이나 선출된 대통령이나 선출된 군주 내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라는 인식을 갖기 쉬웠다"며 그는 "정당이 제도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인물 중심의 민주주의는 매우 불안정하며 지극히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그가 볼 때 민주화와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핵심 과제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과 사회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이와 동떨어진 분야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여기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의 정당체제는 대북정책.통일문제 등 민족문제에 대한 차이가 정치 갈등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다."

최 교수는 한국의 주요 정당들이 사회경제적 정책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다투는 의제는 대부분 민족문제라고 보았다. 대미인식과 한.미관계, 한.일관계와 과거사 문제 등 일제하 혹은 냉전 시기에 뿌리를 둔 민족문제가 이념 갈등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문제는 상대적으로 해결이 쉬운 데 반해 민족문제는 풀기가 지극히 어려운 갈등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최 교수는 "지속적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노동과 복지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사회.경제 이슈를 정책 경쟁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민주화 이후 정부의 정책이 보수적으로 흐른 데는 집권세력이 무능해서만이 아니라 행정관료 기구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탓도 크다고 비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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