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칼럼

이라크전 후의 신국제질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2월 14일 인도 뉴델리에서 중국.러시아.인도가 개최한 3국 외무장관 회담은 김빠진 공동 성명서 하나만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국제사회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이들의 3각 협력은 초기 단계다. 3국은 "국제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국가는 세계 평화와 안보.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의견을 같이했지만 어떻게 달성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들에겐 에너지 이슈 같은 공동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전략적 이해가 쉽게 일치하리란 결론을 내리기엔 시기상조다. 이들 3국은 자신들이 모인 것이 특정 국가에 대항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한자리에 모여 국제 관계의 '민주화'를 외치는 것 자체가 한 국가에 대항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에서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냉전은 그동안 겪은 한 번으로 족하다"며 공세를 피해 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연합(EU)에 포위된 러시아가 화가 났다는 사실이 가려지진 않는다. 과거에 비해 영향력이 줄어든 러시아는 과거의 영광을 일부라도 회복하고 싶어 한다.

중국의 부상과 커지는 영향력은 막을 수 없다. 위성 요격 실험은 이런 중국의 힘에 대해 더 큰 우려를 불러오고 있다. 중국의 세력이 커지면 미국 측의 어떤 반응을 불러올 것인가. 미국은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아프리카를 순방하는 시점에 아프리카 담당 통합사령부인 아프리카사령부(USAFRICOM) 창설을 결정했다. 일단 급한 불을 끈 북핵 문제도 중국의 위상을 강화시킨 측면이 있다. 6자회담 합의는 미국이 애초에 위기를 자초한 면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 줬다. 그리고 중국이 사태 해결에 활발히 참여해야 지역 안정이 가능하다는 믿음도 공고하게 했다.

과거 10여 년 동안 국제정치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첫째, 중국.인도 같은 신흥 강국은 현 세계질서를 뒤흔들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국이 세계 이슈를 주도하는 상황에 무임승차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둘째,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유일 초강대국 체제였다. 셋째, 경제적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주요 강국들 간의 관계는 좋아졌고 제로섬 경쟁을 하지도 않게 됐다.

중국.인도.러시아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다음 이유로 주저할 것이다. 첫째, 그들은 큰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하길 원하지만 어떤 형태의 국제질서를 원하는지 스스로 잘 모르고 있다. 핵무기, 지구 온난화, 유엔 개혁 등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단기적인 국가 이익을 추구할 뿐 아직 국제법적인 질서를 따를 의사가 없는 것이다. 둘째,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당면한 다음 위기인 이란 핵 문제에 관해서는 이들 중 누구도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셋째, 이들 국가는 무임승차를 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을 게 없다.

결론적으로 중국.인도.러시아가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도할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과거 10년간의 국제정치에서 얻은 교훈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전망이 달라질 수 있다. 이제 한 국가가 자기 마음대로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갔다. 따라서 국제적 안정은 각국이 얼마나 합의를 이루느냐에 달렸다. 이를 위해서는 3국이 과거의 강대국과 달리 국제기구를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들의 과거 행동을 감안하면 그리 긍정적이지 않지만 3각 회담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면 지구촌은 격동의 물결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프라탑 바누 메타 인도 델리소재 '정책연구소'소장
정리=최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