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수입가격표 시제 있으나마나 외제 좋아하다 낭패 일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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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같은 제품을 30만원이나 더 비싸게 산것을 뒤늦게 알고 나니 기가 막히더군요.』
이민영씨(32·경기도 성남시)는 지난7월13일 오디오제품을 사기 위해 서울 종로4가 세운상가의 전자제품판매점D상사를 찾았다.
오디오에 대해 문외한인 이씨는 사전 가격정보도 없었던 데다 D상사에서 『성능도 우수하고 가격도 원래는 1백50만원이지만 특별판매기간이라 반값에 판다』는 말만 듣고 일본산요사 스테레오세트를 73만원에 샀다.
이씨는 그러나 집에 돌아온 뒤 다소 미심쩍어 세운상가의 다른 점포에 전화로 가격을 물어보니 모두 43만∼48만원에 판다는 얘기였다.
이씨는 곧 D상사를 찾아가 차액환불을 요구했으나 『일단 판 물건은 환불이 안 된다』는 말만 듣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시장의 빗장이 물리고 수입물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씨처럼 턱없는 바가지가격에 피해를 보는 소비자들이 늘고있다.
정부도 이를 막기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수입가격표시 제도를 도입, 전자제품을 비롯해 의류·가구 등 공산품 49개 품목에 수입가격을 붙이도록 하고 있다.
대상품목을 팔 때는 수출국가의 선적가격(CIF가격)에 관세·방위세·부가가치세·특별소비세를 합친 수입가격과 수입자·수입일자 등을 판매가격과 함께 반드시 소비자의 눈에 잘 띄게 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운상가·용산전자랜드 등의 전문소매점들은 물론 유명백화점에서도 수입가격표시제가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서울압구정동 G백화점의 경우 일부를 제외한 의류·가구 등 수입가격표시 대상품목판매점의 대부분이 소비자가격만 커다랗게 붙여 놓고있다.
이같이 수입가격표시제가 유명무실한 것은 정부의 단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수입업체에만 수입가격을 붙이도록 하고 있을 뿐 판매업소는 의무가 없는 등 제도적인 허점이 많다.
정부는 지난해 수십 차례의 단속을 실시, 4백97건의 위반사례를 적발했다. 그러나 올 들어서는 지난3월 미국·EC 등으로부터 「비관세장벽」이라는 항의가 잇따르자 현재는 사실상 단속을 중단한 상태다.
그나마 적발된다 하더라도 처벌규정이 약해 엄청난 유통마진과 비교해볼 때 실효성 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올해의 경우 1백18건이 적발됐지만 2건만 법원에 고발돼 과태료를 물게됐을 뿐 나머지는 경고·시정명령 등에 그치고있다.
지난1월 한국소비자보호원이 퍼낸 「수입품가격표시제도의 개선방안」에 따르면 수입품의 평균유통마진률은 표시가격의 1백30%로 국산품의 평균 30%보다 4배나 높았다.
수입가격표시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보니 지역·판매점에 따라 값이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의 최병녹 연구원은 『소비재수입은 본래 다양한 국내외 제품간의 경쟁을 통해 가격인하를 유도, 소비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국제무역의 일반이론인데 현실은 이와 달리 거꾸로 나타나고있다』고 말했다.
시장개방으로 국내유통질서가 혼란스런 것은 가격뿐만이 아니다.
동남아·중국 등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버젓이 미국·일본 등의 유명상표를 단채 팔리거나 수입다변화품목으로 국내반입이 금지된 일본제품들이 동남아 현지공장에서 생산돼 국내에 들어오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일본의 우회수출을 포함, 말레이시아·필리핀 등 동남아 10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지난 1∼7월 중 전년동기보다 27% 늘어난 46억8천만달러에 달했다.
이들 제품들은 수입국은 일본이 아니지만 상표는 소니·히타치 등 일본상표를 붙이고 있어 일반소비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팔리고 있는 대부분의 일본전자제품이 동남아산이다.
서울용산 전자랜드의 O상사판매사원은 『요즘 동남아산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할 정도다.
선진국의 유명상표로 둔감한 중국·동남아의 무국적상품들은 품질이 떨어지는데도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정부는 이 같은 무국적상품을 구별하기 위해 지난7월1일부터 의류·가전제품 등 공산품 3백26개 품목에 대해 원산지표시제도를 시행했다.
수입제품에 생산국을 표시, 소비자를 보호하고 수입다변화품목의 우회수입을 막자는 취지다.
원산지표시제도는 미국·일본·EC(유럽공동체)등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시행해온 것이다.
원산지표시제도는 아직 시행초기로 주무부처인 관세청의 담당인력도 5명에 불과, 홍콩의 5백70명에 비해 크게 모자라는 실정이다. 관세청은 지난 8월 한달 동안 서울·부산·김포 등 4개 세관에서 원산지표시대상통관물품 1만8천 여건에 대해 조사를 실시, 이 가운데 표시가 잘못된 9백 여건을 찾아내 시정명령을 내렸다.
적발된 내용을 보면 국내 B사의 경우 인도네시아에서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들여온 내의에 상표는 정면에 크게 쓰고 원산지는 내의구석에 작게 표시했으며 D사는 필리핀에서 일 마쓰시타사 컴퓨터부품을 수입하면서 부품세부목록을 제출하지 않았다.
한편 미국·일본·캐나다 등은 원산지표시제도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으나 유예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불만을 우리정부에 전달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업계에서는 이제도의 보다 강력한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서병홍 한국무역대리점협회부회장은 『우리가 수출할 때는 비누·컴퓨터디스켓 등의 제품에 일일이 원산지를 표시해왔다』며 『뒤늦게나마 시행한 것은 소비자보호를 위해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 수입가격표시제도나 원산지표시제도의 대상품목이 거의 공산품에 치중돼 있어 최근 수입이 늘고있는 의약품·농산품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석철 한국소비자보호원 정책개발연구실장은 『수입가격표시제와 원산지표시제도를 통해 부당한 유통마진을 줄이는 등 유통질서를 확립하면 건전한 수입품소비문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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