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김정일 수줍음 잘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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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난50년대 말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5년간 러시아문학교수를 지낸 재소동포 송희현씨 (71)가 당시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에 다니던 김정일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기를 본지에 보내 왔다. 송씨의 회상기는 송씨의 구술을 본사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한민족체전에 초청 받아 온 송씨는 현재 하바로프스크 고려인연합의 고문으로 재소동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편집자 주】
70평생 처음으로 밟은 서울 땅이다.
오늘로써 서울체류 1주일 째-.
서울의 발전상은 서울올림픽 때 TV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으나 막상 와서 보니 눈부시기만 하다.
지금 우리민족에게 남아 있는 것은 남북통일·화합이나, 남쪽과 달리 북쪽은 김일성 부자왕국을 이루고 있어 나의 살아생전 염원인 남-북 통일을 볼 수 있을지 한스럽기만 하다.
나는 남녘의 땅을 밟고 새삼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떠올리고 있다.
특히 나는 김정일의 김일성 종합대학 선생으로서, 내 큰딸의 절친한 친구로서 젊은 시절 그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기억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소련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평양에 파견된 것은 지난 57년으로 김일성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했다.
나는 당시 지금의 김일성 광장부근인 평양 경상동24번지에 거주했다.
평양생활 3년이 흘러 지난60년 당시 19세의 큰딸 인순(현재 51세)이 김일성 대 외국문학부 러시아문학과에 입학하면서 김정일을 그후 1년 동안 가까이 서 볼 수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김정일은 김일성 대 러시아문학과 상급반에 있던 내 딸 남자친구(현재 북한공산당 고위간부)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일요일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 내 딸과 남자친구·유명한 소설가였던 이기영의 아들, 북한 국방상을 지낸 최상근의 딸 등 4∼5명과 함께 늘 어울려 지냈다.
이들은 집안이 매우 엄격했던 최상근과 이기영의 집을 피해 비교적 분위기가 자유스러웠던 우리 집을 찾아오곤 한 것이다.
김정일은 검은 색의 소련 제 볼가 자동차를 손수 몰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는 짧은 머리의 단정한 차림으로 인사성이 매우 밝았다.
내가 당시 김일성 대학의 교수인 탓도 있었겠으나 우리 집에 와서는 늘 나에게『안녕하십니까』라고 정중히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한 후 친구들이 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당시 그는 수줍음을 잘 타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온순하고 착실했으며 예절바른 학생으로만 보였다.
김정일은 말수는 적은 편이었으나 우리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러시아어로 노래를 곧잘 어울려 불렸다.
김정일은 북한최고통치자의 아들이었지만 거드름을 피거나 오만하지 않아 역시 김일성의 아들답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당시 내가 듣기로는 김정일은 오전6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식사는 반드시 김일성과 같이했으며 아침식탁에서 아버지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들었다.
당시 김정일은 지금과 같이 김일성의 뒤를 이을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김정일도 그런데는 관심이 없는 듯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순진 무구하고 예절 바르던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떠오르며, 지금은 북한에서 아버지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당시 약 1년 동안(61∼62년)일요일이면 우리 집을 찾아오던 김정일이 어느 날 갑자기 발길을 끊었다.
북한은 당시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를 비난하며 소련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마 그 영향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다.
나는 김정일이 발길을 끊은 62년 봄부터 6개월 정도 평양에 머무르다 그해 가을 딸과 함께 소련으로 철수했다.
젊은 시절 가까이 서 보았던 청년 김정일, 그가 김일성 왕국의 새 성주로 등장한다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리=방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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