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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과 납치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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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분단의 역사가 빚어낸 수많은 비극, 그 파편에 한국인의 가슴 한쪽은 무뎌진 지 오래고 나머지 한쪽 가슴은 새까맣게 응어리져 있다고, 거슬러 올라가면 한반도 분단에 일본의 책임도 있다고 대답하면 그네들이 과연 얼마나 납득할 것인가.

나는 일본인의 납치에 대한 분노를 이해한다. 내가 보기에 일본인의 아픔은 아직 살아 숨 쉬는 아픔이다. 아직도 통증이 심한 현재진행형의 상처다. 하굣길에 종적을 감춘 13세 소녀가 25년이 지난 어느 날 이국 땅에 끌려간 뒤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의 그 기막힌 심정이 쉬 잊힐 리 없다. 끝까지 북한을 추궁하고, 살아 있다면 돌려보내고, 숨졌다면 확실한 증거를 달라고 압박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따라서 "피해자가 훨씬 많은 한국도 참고 있는데 일본은 왜 그러느냐"는 식의 접근은 곤란하다.

나의 이해는 여기까지다. 동북아의 평화 안전에 관련된 초미의 과제인 북한 핵 문제와 납치 문제를 연동시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다. 13일 6자회담이 시작된 지 3년 반 만에 처음으로 구체적인 합의안이 나왔다. 비록 합의안이 허점투성이인 데다 최종적인 해결까지 험난한 문제들이 남아 있다 해도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회담 시작 전부터 "일본은 대북 지원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고, 결과는 소문대로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일본의 태도로 인해 합의문의 모양새도 어색해졌다. 별도로 부속합의문을 만들어 일본은 지원에서 빠진다고 명기한 것이다. 관계자들의 후문에 따르면 합의문 발표 하루 전날 밤에는 일본이 "이대로 철수하겠다"는 말까지 꺼냈다고 한다. 그러니 "북한과의 합의보다는 5개국 간의 합의가 더 어렵다"는 푸념이 나온 것도 과장이 아니었던 듯하다.

일본은 왜 이 같은 강경자세를 고수했을까. 국내 정치적 배려를 우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납치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보일수록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이 일본 국내 정치의 역학이다. 납치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야말로 오늘날의 아베 총리를 탄생시킨 원점이다. 더구나 4월 지방선거,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상황이 아닌가. 또 다른 해석도 있다. 합의안 이행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갔을 때 일본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미리 한 발을 빼고 손사래를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의안에 일본 협상단이 대단히 만족해 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그러나 과연 기뻐할 일인가. 만약 북핵 문제가 본격적인 해결의 궤도에 올라섰는데도 일본이 계속 버틴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일본의 발언력이 약화하고 6자회담 당사국으로서의 지위마저 흔들리는 결과가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외교관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모든 외교 행위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란 말이 있다. 날카롭게 현실을 지적한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는 아닐 터다. 북핵과 납치는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6자회담에서만큼은 북핵을 우선해야 하는 것이 옳다.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도 그렇고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도 그렇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