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외교계 세대교체 바람/미국파 몰락… 유럽파가 득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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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위직 절반이상 교체 전망
소련 국가조직이 대격변의 홍역을 앓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소련 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득세해오던 미국파가 몰락하고 유럽파 및 아시아파의 실권이 강화되고 있으며 각 분야에서 세대교체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외무장관에 유럽파인 보리스 판킨 전 체코주재 대사가 임명됐으며,연방상의 회장에는 일본경제 전문가인 쿠리아체프가 취임했고,정부 외곽조직 및 신설조직 핵심포스트에 40대 후반의 비 미국파 인물들이 대거 취임해 이러한 경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 연방 상공회의소등 연방산하 준국가조직과 공산당 계열의 각종 조직들이 해체의 위기를 맞으면서 소속 직원들의 동요가 극심해 일종의 행정공백 현상마저도 나타나고 있다.
9일 이즈베스티야지는 고위 외교소식통을 인용,소련 외교계에서 그동안 득세해오던 미국파가 전통적 라이벌인 유럽파에 실권을 넘겨줬다고 보도했다.
이즈베스티야는 알렉산드르 베스메르트니흐 전 외무장관의 해임이후 보리스 판킨 전 체코주재 대사가 외무장관에 임명된 사실,그리고 그후 계속된 외교관련 부서의 인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그로미코 시절부터 대미 외교부서에서 근무했던 인물들이 외교의 실권을 장악해 왔으며 이러한 전통은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 시절에도 계속 유지되어 왔었다.
외교에 전혀 경험이 없었던 셰바르드나제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미국문제에 대한 자문을 위해 자신의 외교고문으로 미국대사를 지냈던 도브리닌을 임명,미국파 우세가 유지돼왔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파의 기득권은 통독과정에서 나타난 독일파의 실력과 소련에 대한 과감한 경제지원을 실시한 독일의 노력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번 쿠데타 기간중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해외주재 대사 거의 전원이 소환되거나 해임되면서 급속히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 모스크바 외교계의 분석이다.
특히 지금까지 소련외교관 신분으로 대외 첩보활동에 종사해 왔던 국가보안위원회(KGB)와 공산당 외교조직의 전면적 붕괴는 앞으로 소련 외교정책을 크게 변경시킬 것이라고 모스크바 외교 소식통들은 분석하고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11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쿠바주둔 소련군 전면철수를 선언한 것도 외무부내 미국파와 공산당 외교조직의 힘이 약화되고 있는 증거라고 보도했다.
판킨 외무장관은 취임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 외교관의 신분으로 대외공작 업무와 외교정책의 수립과정에 불필요할 정도로 개입해 오던 KGB를 외무부에서 추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모스크바 외교소식통들은 고위직 외교관들의 약 절반이상이 이번 쿠데타 이후의 정국구도와 관련,교체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현재 모스크바에서는 전직 고위공무원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 다국적 기업의 문을 두드리거나 새로운 민간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활발하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그동안 소련의 대외경제업무에 종사하던 인물들에게 활발히 나타나고 있는데 최근 대외경제부 출신의 한 그룹은 외국회사들을 상대로 홍보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이와 함께 앞으로 각 지방공화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대외무역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해체 위기에 직면한 연방상공회의소 같은 기구는 대외 경제부와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완전 상실한 채 조직기구 유지를 위해 안간힘쓰고 있다.
이들은 과거 연방상공회의소 재산으로 분류돼있던 재산을 민영화해 주식회사화,또는 합작회사화 등을 서둘러 진행,앞으로 있을 재산권 분쟁에 대비하는등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연방상공회의소 산하 각종 조직들과 인원들은 현재 이러한 지도부의 노력에 별다른 신뢰를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는 분위기다.
모스크바에 있는 국내상사 지사에도 과거 연방상공회의소등에서 근무했던 인사들이 최근 취직문의를 해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정도다.
과거 소련의 외교경제는 특정기구가 전담하기보다는 각 부처간에 융합된 노력의 결실로 평가받아 왔으나 지난번 쿠데타는 이러한 전통적 정책결정 과정마저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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