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me] 할리우드를 넘어 영화를 진화시킨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지금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감독의 하나는 멕시코 출신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44.사진)다.

2000년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로 칸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그다. "영화 천재의 출연"이라는 열광 속에 칸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도 진출했다. 뉴욕 타임스는 "'아모레스 페로스'야말로 새 세기 첫 고전"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의 신작 '바벨'이 22일 국내 개봉한다. '21그램'(2003)을 잇는 세 번째 영화다. 세상 끝 오열하는 인간군상 속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이냐리투표' 영화다. 훨씬 성숙하고 깊어진 시선으로, 2006 칸영화제 감독상, 2007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 등을 휩쓸었다. 2007 아카데미상에서도 최다 부문(6개) 후보에 올랐다. 데뷔 7년, 불과 세 편으로 거장의 반열에 우뚝 선 것이다. 누군가 아직도 영화가 진전하느냐고 묻는다면 백 마디 답 대신 이 영화를 권한다. 독창적 스타일로 세상을 통찰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의 위대함을 스스로 웅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벨'=창세기 '바벨'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인간이 하늘에 도전해 높은 탑을 쌓자 분노한 신이 인간의 언어를 달리해 혼돈과 단절이 시작됐다는, 그 바벨이다. 영화 '바벨'은 이처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로 나뉘어 갈등하는 현대 인류의 초상이다.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몰이해로 장벽을 쌓고 살아가던 이들이 하나의 사건을 매개로 얽히고, 결국 화해에 이른다. 각자 처한 현실은 지옥이 따로 없이 암담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따뜻한 인간애, 소통에의 확신을 담은 것이다. 특히 9.11 이후 불신과 증오의 벽을 더욱 높게 쌓은 '전지구적 불통' 속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전한다.

영화는 모로코의 산악지대, 멕시코와 미국의 평화로운 주택가, 일본 도쿄의 고층 빌딩숲을 오간다. 애정이 식은 미국인 부부 리처드(브래드 피트)와 수전(케이트 블란쳇)은 모로코 여행 중이고,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는 그들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멕시코 고향집을 찾는다. 모로코의 양치기 형제가 장난 끝에 발사한 총탄이 수전의 어깨를 관통하자, 사람들은 테러의 공포에 휩싸인다. 순박한 모로코인에게 문제의 총을 건네주었던 이는 일본인 사업가 야스지로(야쿠쇼 고지). 그의 외동딸 지에코(기쿠치 린코)는 청각장애인으로 극심한 소외감에 시달린다.

감독은 2년간 4대륙을 누비며 촬영했다. 아랍어.일본어.스페인어부터 수화까지 6개 언어가 등장한다. 통역에 통역을 거치며 작업했던 감독은 이 또한 영화적 주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영화의 힘은 보편적이며, 인간의 정서는 통역이 필요 없다"는 인상적인 수상 소감(골든글로브)은 그렇게 나왔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힌 세상을 뚫어보는 이냐리투 감독의 영화들. 왼쪽부터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 '바벨'

순환하는 삶, 퍼즐 구조= '바벨'의 모든 것은 결국 총 한 자루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각자 흩어진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로 직조해 내는 것이 이냐리투의 퍼즐 구조다. 단순한 영화 기교를 넘어서 그의 작가세계,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언뜻 동떨어져 보이지만 세상은 그처럼 촘촘한 관계망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자동차 충돌사건의 가해자.피해자.목격자가 얽히는 '아모레스 페로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와 가해자, 남편의 심장으로 새 생명을 얻은 남자가 겹쳐지는 '21그램'도 마찬가지다. '바벨'은 전작의 연쇄고리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했다. 아랍과 서구, 1세계와 3세계가 엮인다. 계층과 장애라는 사회적 층위까지 곁들어진다. 그의 퍼즐 구조는 순환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모자이크다.

절망 속에 피는 구원=이냐리투의 사람들은 모두 운명의 장난처럼 갑작스러운 사고로 나락에 떨어진다. 수잔의 피습으로 시작된 '바벨'처럼 말이다. 이들의 운명은 예측불허, 한 끝 차이로 엇갈린다. 그러나 언제나 구원은 있다. '21그램'의 인물들은 시종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고 되뇐다.

운명론적 절망에도 한 줄기 구원의 확신을 놓지 않는 것은 라틴 감독인 그의 뜨거운 피 때문은 아닐까.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로 흔들리는 영상,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속도감 넘치는 화면은 현기증 나는 삶에 대한 은유다. '바벨'에서 카메라의 속도감은 현격히 늦춰졌다.

할리우드를 뛰어넘어=그가 '아모레스 페로스' 이후 2년 만에 할리우드로 날아가자 세계 영화계는 '천재의 타협과 변절'에 대한 우려로 들끓었다. 그러나 숀 펜.나오미 와츠 등 쟁쟁한 할리우드 톱스타와 작업한 '21그램'은 모든 우려를 불식시켰다.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는 감독임을 입증한 것이다.

'바벨'에도 별들의 행진은 이어진다. '생애 최고 연기'라고 호평받은 브래드 피트를 비롯, 케이트 블란쳇.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야쿠쇼 고지 등 다국적 스타군단이다. 이들을 현지 캐스팅한 비전문 배우, 신인들과 함께 멋진 앙상블을 이루게 한 연기 조련술이 빼어나다.

청각장애 소녀를 열연한 기쿠치 린코는 무명임에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일본 열도를 흥분시키고 있다. 브래드 피트와 호흡을 맞추는 모로코 현지인의 꾸밈없는 연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적인 메시지다. 피트의 딸로 나오는 엘르 페닝은 '꼬마 스타' 다코다 페닝의 동생이다. 18세 관람가.

양성희 기자

영화'바벨'의 숨은 도우미는

'바벨'에는 이냐리투의 영화적 파트너들이 참가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길예르모 아리아가,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 음악감독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다.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 모두에서 작업했던, 이냐리투 영화세계의 부분들이다.

길예르모 아리아가는 복잡한 내러티브와 강렬한 드라마, 모순에 찬 인간군상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멕시코 작가다. 이냐리투의 정신적 분신으로 불릴 정도다.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질주하는 분방한 카메라로 이냐리투 영상미학을 뒷받침한다.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거쳐 현재 그의 차기작 '러스트 코션'을 찍고 있다.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이국적이고 서정적인 선율은 이냐리투 영화의 감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아카데미 음악상에 빛나는 '브로크백 마운틴'등이 대표작이다.

그러나 최고의 조력자이자 영감의 원천은 감독의 가족이다. 태어난 지 이틀 된 아이를 잃었던 감독의 경험은 '갑작스러운 사고'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된 계기로 꼽힌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모든 영화를 가족에게 바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양성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