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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선거 연령 낮춰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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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랜만입니다'라는 제목의 e-메일이 날아 왔다. 누굴까하는 생각과 함께 무심코 눌렀더니 반갑잖은 포르노 사이트의 쓰레기(스팸) 메일이 뜬다. 화면 한가운데 19라는 붉은색의 큰 숫자가 써있고 청소년 유해 매체물이기 때문에 성인 인증이 필요하다는 문구도 보인다. 19세가 되면 유해 매체물이라는 포르노를 볼 수 있는 모양이다.

*** 정치적 판단 능력 기준은 뭔가

이 아침부터 칙칙하게 포르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법적으로 특정 사회적 활동이 허용되는 나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나이가 많아 못 들어가는 술집이나 나이트클럽 같은 곳도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경우에 못하는 일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적어도 18세는 돼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우선 18세가 되면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 요즘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군대에 갈 수 있다고 하니 18세부터 입영이 가능한 셈이다. 또한 부모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18세부터 결혼도 가능하단다.

그러나 서로 다른 활동에 대한 법정 연령 사이에 모순도 적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면 18세에 결혼한 부부는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을 것이다. 19세부터 허용된다고 하니 말이다. 코미디 같다. 보다 심각한 모순은 정치적 의사 표현과 관련돼 있다. 국가는 18세, 19세 청년들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만 이들에게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하고 있지 않다. 결국 의무만이 일방적으로 강제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가정을 꾸린 18세, 19세 부부는 세금이 너무 많거나 치안이 불안정해져 살아가기 힘들어도 위정자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연령은 18세다. 각종 국제경시대회에서 나타나듯이 우리 젊은이들의 학력이나 학업 성취도는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우수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유독 이들의 정치적 판단 능력에 대해서만은 외국의 동년배들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는 것 같다. 심지어 성인으로 대우받는 대학교 1학년이나 2학년 학생 중 다수가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비해 영국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내부 검토 수준이기는 하지만, 최근 15세로 선거 연령을 낮추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발상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겪어온 성인들은 학창 시절에 자치 선거를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학교 측에서 회장부터 반장까지 일방적으로 임명해 학도호국단이라는 기구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선거를 통해 자신의 대표를 뽑는 행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다. 학교 선거가 아니더라도 지금 아이들은 촛불시위에 참여하거나 인터넷상에 글을 올림으로써 이미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일에 매우 익숙하다. 정치는 이처럼 우리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배워가는 것이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민주 시민의 함양을 쌓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선거 연령이 낮춰지지 않았던 또 다른 까닭은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복잡한 이해득실 계산 때문이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담배를 피우고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정치는 나쁜 것, 유해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인식이 계속되는 한 정치적 불신과 냉소는 세대를 이어 재생산될 것이고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까지 떨어진 투표율은 더욱 낮아지게 될 것이다.

*** 與野 이해득실 계산 그만둬야

18세가 되면 결혼할 수 있는 이들을 두고 무조건 어리고 미성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살아본 이들은 다들 느끼는 것이지만 결혼이 어디 보통일인가. 그 어렵고 위험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국가가 인정하는 마당에 이들이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만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더욱이 아무리 우리 정치판이 꼴불견이고 비교육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9세면 볼 수 있다는 포르노보다 더 유해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번 정치개혁을 통해 선거 연령은 반드시 낮춰야 한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