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칼럼

북·미 협상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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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정부 당국자의 설명대로 북한의 핵 폐기에 대한 보상을 성과급 방식으로 한 것은 북한의 약속위반을 제법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합의이행을 주춤거리면 중유기준 총량 100만t으로 정해놓은 대북지원도 지체 또는 중단된다. 정부 당국자는 이것을 디스인센티브(Disincentive) 방식이라고 말한다. 보상몰수라는 의미다. 원자로 동결만으로 매년 50만t의 중유를 또박또박 받던 1994년 제네바 합의와 다른 점이다. 북한에 중유 100만t은 큰 보상이지만 폐쇄.봉인 이후에 궁극적인 핵 폐기로 가는 과정에서 기대되는 경제.정치.인도적 지원은 더욱 매력적일 것이다.

2.13합의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미국은 2002년 10월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근거로 북한을 압박해 제2차 핵위기를 촉발시켰다. 그런데 이번 합의의 어디에도 고농축 우라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북한이 개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존 핵무기에 대한 말도 없다. 합의 이행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틀림없이 등장할 경수로 제공 문제도 그냥 넘어갔다. 붕어 없는 붕어빵 꼴이다. 결국 5개 실무팀 중심으로 진행될 앞으로의 협상으로 뜨거운 감자를 떠넘긴 것이다. 그래서 2.13합의는 핵보유국으로 자처하는 북한이 매 단계마다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올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야구의 비유로 돌아가면 북한은 경기 도중에 룰을 바꿔 3루 다음에 홈이 아니라 4루, 5루, 6루까지 만들어 핵무기를 포함한 핵프로그램 완전 폐기라는 홈인의 대가를 최대한으로 받아내려고 할 것이다.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더라도 북한이 비핵화로 갈 의지가 있다면 다행이다. 핵실험까지 한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할 것인가는 신(神)이나 아는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이 중유를 포함한 경제지원의 대가만 받고는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에 에너지와 식량은 체제의 안전보장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경제보다 체제가 우선이다. 김정일이 군부의 핵무장론자들을 설득하여 핵무기 포기를 결심하는 데는 북.미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다. 미국은 2.13합의에서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대북 금융제재를 해제하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의 이름을 지우고, 적성국과의 무역을 규제하는 법을 고치겠다고 약속했다. 평화협정의 비전도 제시했다. 미국이 그런 쉽지 않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하려면 북한이 2005년 9.19공동성명과 이번 2.13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2.13합의 성패는 무엇보다도 북.미 협상에 달렸다. 북한과 미국은 신뢰 제로의 관계다. 북.미 협상에 진전이 없으면 나머지 4개 실무팀의 협상도 공전할 것이다. 다행히 부시 정부의 대북 자세가 바뀌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부시는 지난해 10월 기자회견 때 북핵문제에 관한 답변에서 '외교'라는 용어를 11번 사용하면서 평화적 설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부시 정부가 6년 동안 반대해온 북.미 양자회담에 응한다는 신호였다. 지난달 베를린의 북.미 회담이 2.13합의의 '아버지'다.

한국은 남북대화와 협력을 북.미 협상에 조화시켜야 한다. 경제지원 재개를 서두르고, 의제가 모호한 남북 정상회담에 매달리고, 북한문제를 대선에 이용하려고 한다면 5개국 모두의 대북 협상력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어렵사리 1루까지 나간 주자를 한반도 비핵화의 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북.미 협상에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