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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핵 포기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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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관련국들 모두 수익계산에 여념이 없지만 시야를 한반도로 좁혀 보면 북한이 가장 큰 수혜자다. 식량과 에너지 지원을 확약받음으로써 급한 발등의 불을 끌 수 있게 됐고, 내부 단속을 정당화할 근거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북핵 문제가 야기한 불확실성을 줄임으로써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완화할 수 있게 됐다. 대북 지원이 재개되고 남북 교류도 다시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그간 한반도 상공을 뒤덮은 '북핵 먹구름'이 2.13 합의로 해소될 수 있는 계기를 맞은 것일까? 앞으로 수많은 북한전문가.국제정치학자.정책분석가들이 나름의 진단을 내놓으면서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지난(至難)한 일일 것이라고 나는 본다. 미국의 대북(對北) 적대정책을 제외하면, 이는 주로 이념적이고 체제 내부적인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체제 재생산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북한은 '실패한 국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주기적으로 거론된 붕괴론에도 불구하고 북은 지금까지 버텨왔고 핵실험에도 성공했다. 한국의 물적 지원과 중국의 후견(後見)이라는 외부적 요인을 논외로 하면, 북한 체제의 내구성(耐久性)은 체제 내적인 것이다. '유격대 국가'가 상징하는 항상적 전시동원체제의 끈끈함이나 '주체경제'의 폐쇄성과 함께 사상 무장과 연결된 선군정치가 생존의 요체로 떠오른 것이다.

정치적으로 북한의 본질은 '김정일의, 김정일에 의한, 김정일을 위한' 체제로 요약 가능하다. 일사불란한 북의 견고함은 수정주의 학자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수령의 유일지도체계가 공고히 한 내구성은 90년대 이후 되풀이되는 체제 위기를 북한이 돌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자연재해, 미증유의 대량 아사(餓死), 1.2차 핵위기를 딛고 핵 클럽의 일원까지 됐다는 점에서 통치자 김정일은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최대 딜레마는 이런 성공이 총체적 실패와 한 동전의 양면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 체제의 정치적 특징은 수령경제와 군부경제가 정상적인 내각 경제를 압도하는 기형적 형태로 이어져 전면적 경제파탄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식을 초월한 유일체제의 동원력은 고립무원의 경제난을 뚫고 핵 개발까지 성공시켰다. 문제는 몇 발의 조잡한 핵무기가 인민을 먹여살리거나 공장을 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핵을 미끼로 전기와 식량을 강요하는 북의 행태는 일종의 '갈취경제'이며, 한 국가가 자생적 재생산 능력 없이 이런 기생적(寄生的) 방식으로 오래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북한 체제가 재생산 능력을 갖춰 '정상국가'화하기 위해서는 유일지도체계가 수정되고 개혁개방이 이뤄져야 한다. 상하이.푸둥.선전 등 중국 남순(南巡) 여행에서 김정일이 '천지개벽했다'고 찬탄했지만 몇 번의 미적지근한 시도 말고 본격 개방을 할 수 없는 이유는, 개혁이 유일지도체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군정치와 핵은 김정일의 기득권을 지키는 최후 보루인 것이다.

핵으로 무장한 유일체계를 옹위하면서 경제와 인민도 살리는 것을 김정일은 원할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가 보위하는 유일체계가 존속되는 한, 북한 경제가 작동하거나 인민들이 숨 쉴 공간은 창출될 수 없다. 이처럼 김정일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구조적 난경(難境)에 처해 있다. 북핵 폐기를 위한 6자회담이 앞으로도 험준한 고산준령을 수도 없이 넘어야 하는 이유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