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대 초빙교수 신은희씨의 북한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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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는 세상 어디나 다 비슷합니다”
남한에서 김일성 종합대, 평양 외대 초빙 교수로 ‘저명’한 신은희 미국 심슨대 종교학과 교수의 말이다. 방학을 이용,1주일~10일 가량 동서양 종교나 세계 문화를 특강 형식으로 북한에서 강의해온 신 교수가 13일 오전 남북물류포럼 7회 조찬 간담회에서 강의했다.

제목은 ‘변화를 위한 동거-새로워지는 북한 사회’다. 신 교수는 북 경제 양극화가 있고, 영어 파워가 쎄며, 신구 세대의 갈등이 있다고 한다. 정치라는 커튼을 젖히면 그 뒤에는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는 뜻이다. 마침 북핵 문제 해결의 가닥이 잡힌 날이다. 신교수의 진단처럼 이제 북측과 핵이 아닌 사람들을 통해 만나기를 기대할 수 있겠다. 다음은 이날 오전 신교수가 전한 요즘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어는 권력이다=남에서도 그렇지만 북한에서도 영어가 권력이다. 지도층 내부는 더 그렇다. 영어를 잘하면 핵심 요직에 들어갈 수 있다. 해외에서 일 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 영어에 매달린다.

평양 외대에 가면 건물 입구가 글로벌 라운지다. 여기서는 영어만 통한다. 인사부터, 강의까지 모두 영어다. 다 그렇게 영어를 잘한다. ‘직접체계통역’이라고 우리로 치면 동시 통역사도 양성하는데 한국과 달리 조선어 외에 두개를 마스터 해야한다. 조선어+영어+노어인 셈이다.
그러나 교재는 열악하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교재로 사용하곤 했다. 코미디나 러브스토리 같은 비정치적 영화다. 사운드 오브 뮤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것들이다. 타이타닉을 노컷 신으로 보여주니까 “정말 좋더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선정성만 없으면 명작 영화는 학교에서 그대로 교재로 쓴다.
해외 근무를 선호하는 성향이 묘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외국에 6개월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보고 살 때는 모르겠는데 보고 오니 힘들다”는 말도 한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 평양에 남한 장로교 지원으로 봉수교회가 멋지게 새로 지어졌다. 그러자 감리교도 7억원을 들여서 칠골 교회를 올리고 있다. 평양에서 남한 교회의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현상에 대해 북한 사람들은 “혼 빠진 짓을 이해 못하겠다. 왜 제국적 관점에서 하나”라고 웃는다.
북한 목사들은 서열이 높다. 해외 인사 가운데 빌리 그레이험 목사 같은 기독교 인사가 오면 제일 먼저 가보자고 하는 곳이 교회다. 이럴 때는 일개 신도가 접대할 수 없다. 그래서 핵심 인사가 정치,종교적인 역할을 해야한다. 그러기에 서열이 높다.

▶각종 갈등들=여러 차이들로 인해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먼저 세대 차이다. 국장급은 물갈이 돼 30~40대가 주류다. 그래서 저녁 자리가 되면 위원장 부위원장등 원로급은 일찍 보내고 난 다음에 논다. 30~40대 사람의 노는 모습은 꽤 서구적이다. 특히 젊은 해외 파들은 “조국의 미래가 개선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하며 답답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부위원장 등 전쟁 체험자들은 술을 먹으면 “통일되면 통일 대통령은 김정일 장군 아닌가“라고 하는데 30대는 이들을 슬쩍 제치거나 일찍 보내 말을 피한다.
군을 제대한 사람도 고통을 겪는 것 같다. 제대한뒤 고향에 가서 처절한 모습을 보면 북한의 경제 양극화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교육 양극화도 심하다. 북의 엄마들도 거센 치맛바람을 일으킨다. 영어 수학 과외를 하면서 쌀이나 컴퓨터 부품 등으로 지불한다.
영어는 중국에서 들어온 불법 CD를 공부해서 그런지 발음이 과거 영국식에서 미국식으로 완전히 변했다. 엘리트 교육도 열성이어서 “영재 교육에 관한한 안면이 안통한다”는 말을 한다. 말은 계급없는 사회이며 노동자가 대접 받는 사회라고 하지만 운전사가 같이 식사도 못하는 계급 사회다.

▶노동신문의 변화=북한의 노동신문 가운데 인턴십이 있다.한국으로 치면 실무 수습 기자인데 6명을 특강한 적이 있다. 해외 사람들이 편하게 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그들은 해외에선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궁금해 했다. 연애ㆍ인간사 등을 쓰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해외 젊은 독자층을 겨냥한 인터넷 사이트를 준비하는 것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그들에게 ”노동 신문이 너무 어렵다. 너무 무섭고 전투적이다. 부드럽고 재미있고 섹시하게 써달라”고 했다. 그러자 섹시를 새악시로 받아들였는지 여성적으로 쓰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 ”장군님의 위대한 말씀을 어떻게 여성적으로 쓰는가“라고 비판했다.“세련되게 쓰라는 말”이라 해도 “장군님의 위대한 업적을 어떻게 여성적으로 쓰는가”라고 단호했다.

▶북한식 다원주의와 민족주의=지난해 9월 심양에서 고려학 학회가 있었다. 김일성대와 평양외대 교수가 나갔다. 북측의 원고 발표가 있었다. 그 때 한 남측 교수가 듣다가 “이런 걸 논문이라고 준비했느냐. 선동하지 마라”고 했다. 나이 많은 북측 교수가 일단 사과했다.
그런데 그 남측 교수가 “다음엔 똑바로 하라”고 한 걸음 더 나가자 젊은 북측 참석자가 “어디서 배운 버르장 머리냐. 우린 당신에게 우리식 대로 하라고 요구하지 안는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당신네 식으로 요구하는가. 우리가 더 다원주의적이고 포스트 모던적이다”라고 대든 기억이 있다. 그들은 철수했다.
김일성대의 대학생들은 남한 학생에게 전해달라며 이런 말을 했다. ”왜 남한 학생들은 민족주의적 정신이 없는가. 좋은 차 타고 돈 벌고, 미제 흉내를 내는 것이 전부냐. 우리는 못살아도 민족의 혼이 있다.” 북에는 ‘남은 탕자 북은 지존’이란 고압적 자세가 있다.
지난해 4월27일 노동 신문에 하인즈 워드를 대서 특필한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서 다인종 다문화에 대해 ”혼혈 민족은 민족의 독소“라고 한데 대해 내가 미국서 국내 인터넷 신문인 통일뉴스에 이를 비판하는 원고를 썼다. 그랬더니 바로 바로 북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뭐 섭섭하게 한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로 특별히 문제삼고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북한식 음담(淫談)=금요 노동을 농담화한 것이 있다. 결혼한 남자가 처녀와 자면 건전노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부와 그렇게 하면 애국 노동이라고 한다. 국가가 해줘야 하는 걸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와 잠자리를 갖게 되면 그건 강제노동이다.
또 다른 얘기. 어느 남자가 말년에 부인에게 인생 총화(회의)를 했다. “나 바람 피웠는데 회수를 따지면 광주리에 콩알을 가득 채울 만하다.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은 “괜찮다. 나는 깨알로 세야한다”고 했다.
뉴욕주재 북한 유엔 대표부의 부탁으로 시작한 이 특강 사업을 신 교수는 한번에 3000~4000 달러의 자비를 들여가며 벌써 10회째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북한 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듯하다”며 “아침엔 평양에서 오후엔 서울에서 강의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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