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지킨다" 똘똘뭉친 소국민들|중대 무용단이 본 소쿠데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19일 레닌그라드에서 소련의 쿠데타 사실을 알고 군부와 개혁파의 무력충돌위기가 한껏 고조된 20일 오후 모스크바 공항을 빠져나온 국수호 교수(중앙대)가 21일 오후 귀국했다.
전소련 고려인협회 초청에 따라 중앙디딤무용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와 타슈켄트에서 광복 46주년 기념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소련쿠데타 현장을 직접 목격한 국씨의 체험기를 소개한다.
『고르비가 병으로 물러났습니다. 소련의 자유는 이제 끝난 거죠.』
19일 오전9시 레닌그라드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시작하려는데 여행사의 안내원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순간 소련이 우리와 수교한 나라라는 사실도 잊고 『공산국에 와 있구나』하는 10여 년 전에나 느낄 법한 공포에 휩싸였다. 어쨌든 미리 약속한대로 레닌그라드 국립발레단으로 가 예술감독 보리스 예프만을 만났더니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군인들이 와서 카메라가 몇 대 인지까지 세며 재산상태를 파악해갔다』며 『자유 없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예술가로 살 수 없다』고 비장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실패한 것을 안 지금 나는 『소련이 얼마나 뒷걸음질치는가를 지켜보겠다』고 말하던 예술인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그들이 결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함께 붙잡혀갔다는 등 소문과 방송내용이 계속 엇갈리더니 오후 6시쯤 돼서야 고르바초프만 실각했으며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는 정리된 소식이 알려졌고 소련인들은 한결같이 옐친의 용기를 칭찬하고 있었다.
오후 10시30분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던 기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느닷없이 출발시간이 앞당겨져 기차에 오른 것은 19일 오후 7시25분. 불안과 긴장 속에 잠 못 이루다 20일 오전 4시30분 모스크바 역에 도착하니 장갑차와 탱크들이 시내 곳곳에 깔려있었다. 크렘린궁 일대의 길목은 모두 차단돼서 여러 차례나 길을 되돌아가며 호텔에 도착했으나 쿠데타 상황이 궁금해 이날 오후의 비행기 출발시간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오전 11시쯤 크렘린궁 앞에 가보았다. 평소에는 수백 대쯤이나 뒬 듯 싶던 관광버스들이 서너대 가량밖에 없고 구경꾼도 소련인이 아닌 외국인들뿐이었다. 탱크로 크렘린궁을 지키는 군인들이 일부 관광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에 우리 일행도 함께 찍으려니까 처음에는 손을 저으며 마다했지만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았다. 일행과 함께 군인들과 사진을 찍었다. 쿠데타군과 사진을 찍다니.
우리를 안내한 안내원은 시위군중이 펼쳐든 플래카드에 「KGB와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쓰여있다며 시민들은 고르바초프를 전폭 지지한다기보다 보수반동으로 회귀시킬 쿠데타세력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요건물이나 다리마다 양켠을 탱크부대가 지키는 삼엄한 분위기에도 약속대로 찾아간 모스크바 국립발레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연습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물론 분위기는 흡사 초상집처럼 무거웠다.
서울의 명동과 비교할 만한 아르바트 거리로 가보니 소련인은 상인밖에 없고 온통 갈 곳 없어 모여든 외국 관광객들뿐인데 민속인형이나 호박 등 기념품값이 지난 16일에 비해 두 배로 뛰어 있었다. 또 고르바초프의 초상이 그려진 옐친의 대자보가 눈길을 끌었다.
오후 4시쯤 호텔로 돌아왔다. 환전소는 이미 문을 닫았고 모스크바의대에서 연수중이던 한 서울대 의대 졸업생이 귀국여부를 결정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오후8시 출발예정인 소련국영 아에로플로트 여객기를 타기 위해 일찌감치 서둘러 오후 4시 30분 호텔을 나섰다. 모스크바 외곽에서 시내 쪽을 향해 군인과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과 탱크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공항에 도착하니 소련 세관원들이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텐데 당신들은 한발 앞서 떠나게 됐으니 행운아』라며 부러움 섞인 축하인사를 했다.
마침내 서울행 여객기에 오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우리를 안내해준 26세의 여행사 직원 리자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는 이제 스탈린 시대처럼 빵은 있어도 자유가 없는 지옥을 맞게 될 겁니다. 자유와 빵을 바꿔야 하다니….』
승무원들은 서울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지난 14일의 아에로플로트 승무원들과 거의 다름없는 태도로 서비스했지만 왠지 그 표정은 한결 무겁게 느껴졌다. 그들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