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계” 바로잡은 안팎의 주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옐친/이단아에서 개혁의 구원자로
소련 정치의 이단아였던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이 이제 소련 민주주의 개혁의 구원자로 등장했다.
19일 당·군·KGB 등 강경보수파의 쿠데타가 일어난지 하루뒤인 20일 정오 모스크바 러시아공화국 의회앞 광장에 15만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옐친 대통령은 보수파의 행동을 반국가적 범죄로 규정하고,『그들이 총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을진 몰라도 총칼위에 오래 앉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옐친 대통령의 이같은 과감한 행동은 지난 6월 자신을 압도적 지지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해준 러시아 국민의 민주의지에 대한 굳은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쿠데타를 단행한 보수파가 군·KGB·경찰이라는 물리적 힘을 보유하고 있음에 반해 옐친 대통령이 이끄는 개혁파 진영은 소련 국민의 지지라는 무형적 힘뿐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무형적 힘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20일 정오 모스크바에선 15만 군중이 모인 반쿠데타 집회가 열렸으며 레닌그라드에선 20만군중이 모였다.
뿐만아니라 옐친 대통령의 총파업 호소에 따라 서시베리아 쿠즈네츠크탄전,북시베리아 보르쿠다탄전·튜멘유전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 지방의회들은 쿠데타 지도부인 국가 비상사태위원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섰다.
옐친 대통령은 이와 함께 아나톨리 루키야노프 연방최고회의 의장 앞으로 ▲24시간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 ▲군철수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해산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0개항목 요구서를 전달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옐친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정치라이벌인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원상회복」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보수파의 쿠데타 정통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협조적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고르바초프는 85년 자신이 집권하자마자 시베리아의 한 무명정치인이었던 옐친을 일약 모스크바시 당제1서기로 등용한데 이어 86년 2월 당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앉혔다.
87년 옐친의 개혁입장에 당내 보수파가 들고일어나자 고르바초프는 부득이 옐친을 모스크바시 당제1서기에서 해임하고 한직인 국가 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옐친은 재기했다. 그는 89년 3월 소련 인민대의원 선거시 모스크바지구에서 출마,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됐다. 옐친은 그후 급진개혁파의 리더로서 「지역간 대의원그룹」을 이끌었으며 지난해 5월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옐친은 이어 지난 6월 실시된 러시아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고르바초프에 이어 소련 정치의 제2인자로서 자리를 굳혔다.
서방 지도자들,특히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이번 쿠데타 과정에서 옐친이 보여준 「용기」를 치하하고,그를 『소련 민주주의의 새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미국측의 이같은 평가는 옐친의 국제정치 지도자로서 지위상승을 의미한다. 그동안 고르바초프에 비해 국제무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던 그가 이제 국제무대에서 오히려 고르바초프를 능가하는 위치에 섰음을 뜻한다.
뿐만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새 연방조약이 통과되면 연방정부가 약화되고 공화국 중심의 지역정치가 강화될 것이 분명하므로 그의 정치적 위치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정우량기자>
◎부시/단호한 거부… 「비상위」 치명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있어 소 쿠데타 실패는 걸프전에 이어 또 하나의 정치적·외교적 승리다.
소련의 쿠데타가 3일 천하로 끝나게된 데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으나 부시 행정부가 사태 초기부터 쿠데타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쿠데타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킨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부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러한 미국의 단호한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21일의 기자회견에서 『옐친은 미국이 자신을 확고하게 지지해준 덕분에 사태가 결정적으로 달라진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으며 러시아 최고회의도 미국의 이같은 지원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사실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이번에 소련을 상대로 한판의 도박을 한 셈이었다.
미국은 러시아가 볼셰비키혁명의 와중에 휩싸였을때 반혁명군쪽을 위해 싸웠던 것을 제외하고는 공산정권 수립 이후 70여년동안 소련내의 정치변화에 대해 일체 침묵을 지켜왔다.
소련의 지도자가 누구로,어떤방식으로 바뀌든 그것을 현실로 인정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내정을 간섭하는 행동은 금지해왔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그는 쿠데타 지도자들을 「배반자 집단」이라고 규정하며 그들이 집권하는한 미국은 일체의 관계를 정상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만일 쿠데타가 성공으로 끝나 이들의 집권이 정상화될 경우 부시와 소련 새 지도부와의 관계는 불을 보듯 최악의 지경에 이를 것이 확실했다.
그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부시가 확실한 입장을 선택한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미국은 쿠데타 발생 정보는 없었으나 사태 발생 직후부터 이번 쿠데타가 불발로 끝날 것으로 상황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부시로서는 방관자로 있을 경우 져야할 국제·국내 정치의 부담도 고려치 않을 수 없었다.
걸프전쟁 승리 이후 명실공히 세계의 유일한 강대국으로 부상한 마당에 정치적 현실을 인정한다는 논리로 소극적으로 대응할 경우 받을 타격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부시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고르바초프에게 쏟았던 투자와 기대도 그를 살리자는 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시는 이 시점에서 소련의 개혁과 민주화를 위해서는 고르바초프가 적임자라는 견해를 누차 공개적으로 강조해 왔으며 그를 『함께 일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해 왔다.
특히 강경보수의 쿠데타 세력이 집권할 경우에 동서의 새 긴장으로 인해 미국이 져야할 부담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20일의 기자회견에서 『어떤 경우도 이미 실현된 동구의 민주화는 역전시킬 수 없다』고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도 소련의 강경세력 등장이 몰아올 국제정치의 역풍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걸프전 당시 사담 후세인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물리치는 것이 정의라는 입장에서 전쟁을 결심한 인물이다.
그는 이번 소련사태도 이와 비슷하게 선악의 관점에서 구분하고 있다.
주변국을 침공한 이라크가 악의세력이었듯이 합법적인 지도자를 몰아낸 소련의 쿠데타세력도 악의세력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이번 쿠데타 좌절이 부시의 승리였다면 이는 그의 이러한 도덕적 판단에 대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워싱턴=문창극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