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大馬 불안의 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내년은 경기가 좋아져 떼돈을 벌 테니 어서 투자하라구. 아냐 내년 경기는 엉망이어서 쫄딱 망할 테니 절대로 투자하면 안돼. 당신이 기업가라면 어떤 권고를 따르겠는가? 내년 경기에 어떤 특별한 확신이 없는 한, 투자할 확률과 투자하지 않을 확률은 50대50으로 꼭 같다. 그러나 출제자 케인스의 답은 후자였다. 기업가는 낙관적인 전망보다 비관적인 전망에 훨씬 쉽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 비관 심리가 강한 경제 주체들

케인스의 확률 계산이 틀린 것일까? 천만에! 그는 '확률론'이란 책을 집필했다. 경제의 '구조' 분석에 몰두한 이전의 학자들과 달리 그는 특별 요인 하나를 추가했으니, 경제 주체의 '심리'가 그것이다. 기업가한테 낙관의 심리보다 비관의 심리가 강하다는 그의 관찰은 1930년대의 대공황을 목도하고 처방전을 마련한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한국 경제의 구조가-근자의 유행어로는 '펀더멘털'이-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죽을 쑨다면 그것은 심리적 반작용의 결과이기 쉽다. 실질 금리가 0에 가깝게 떨어지는데도 투자가 살아나지 않고, 국내에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인데도 기업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현실이 그러하다.

그 좋아하는 시장 원리 다 어디 갔어? LG카드에 2조원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보도에 접하며 혼자 중얼거린 말이다. 시장이 불안하면 시장 원리로 잠재우면 될 것 아냐. 농담 말자. 또 대마불사(大馬不死) 타령이냐고 비아냥거리기는 쉬우나, 대마가 죽어도 금융 시장이 버티겠느냐는 반문에는 대답이 쉽지 않다. 국제통화기금까지 모셔왔던 외환위기 와중에 몇몇 대마가 쓰러졌지만 그 뒤치다꺼리로 1백61조원의 공자금을 쏟아 부었다. 대마보다 대마 장례비가 더 든 셈인가? 이번 수혈로 LG카드는 고비를 넘겼으나 대신 은행들이 빈혈을 앓게 생겼다. 아마도 금융 당국의 강력한 지원 종용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드러내놓고 탓하기는 어렵다. 정부 조처에 돌을 던지려면 시장 원리대로 처리했을 때에 생기는 극단의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데, 솔직히 그렇게 착한 언론과 국민이 몇이나 되겠는가?

요즘 검찰의 인기가 상한가를 치고 있다. 대선 자금 수사가 정치 개혁의 확실한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 때문일 것이다. 검찰이 칼을 뽑았다가 그대로 꼽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이번에는 호박이라도 베기를 바라며, 또 수뇌부의 표정으로 보아 호박 덩굴 아닌 정치자금 덩굴 몇 개는 벨 것도 같다. 그러나 그 칼이 재계로 향하자 기업은 '경제에 미칠 영향'을 앞세워 선처를 구하고 있다. 경제 불안은 이럴 때마다 내놓는 재계의 고정 메뉴지만 거기 엄살도 섞이고 사실도 들었을 것이다. 나는 검찰 수사가 호되기 바란다. 농담이 아니다. 호되어야만 뒷날 다시 손 벌리는 정치인한테 돈 드리고 회사 문을 닫을까요 라며 기업도 이판사판으로 버틸 것이기 때문이다.

법대로 할 때의 고통 역시 시장 원리대로 할 때의 고통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검찰도 경제 불안이 부담스러웠는지 기업의 자진 협력을 전제로 선처 호소에 고려할 뜻을 비췄다. 문제는 자진 협력의 내용이다. 요컨대 순순히 불라는 말씀이다. 사과 상자였는지, 라면 박스였는지를 부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불고 난 뒤가 켕기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노련한 연방수사관이 붙어 증인 보호에 나서지만, 기업은 어디 숨어서 장사할 수가 없다. 불란다고 멋모르고 불었다가 당하거나 더 세게 당한 정치인들이 날을 세울 때 그 '괘씸 죄' 후환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랴.

*** '손 벌리는' 정치인이 없게 하라

그런데도 검찰의 칼날이 정계를 '우회해서' 재계에 파고드니 기업으로는 여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 역시 개혁의 목청을 높이는 듯하더니 벌써 '없었던 일'로 끝내려는 모양이다. 그러니 기업이 무엇을 믿고 순순히 분단 말인가? 정치판 개혁 없이 기업에만 매를 들면 기업은 어쩌란 말인가. 몰아도 퇴로는 열고 몰아야 한다. 호된 수사와 퇴로 열기의 묘수 궁리는 검찰의 몫이다. 내 공부는 심리보다 구조 쪽으로 기울지만 요즘 소신이 흔들리고 있다. 외국인한테 계속 넘어가 성한 것이 얼마 없는데 그나마 자꾸 다치면 나라 경제는 어쩌느냐는 '대마 불안' 때문이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