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날」8·15(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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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해전 바로 광복절 중국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도 연길에서 있었던 일이다. 우리 일행은 백두산 등정 전에 먼저 연길조선족박물관에 들러 석기·철기시대의 화석과 토기,이 지역 일대에서 살아온 우리조상의 농업·생산·생활·가례·가무 등을 실물과 모형 또는 사진으로 구경했다.
그러던중 문득 생각이 떠올라 박물관 안내인에게 오늘이 광복절인데 무슨 경축행사라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광복절이라니요. 무슨 말씀입네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고 오히려 묻는 쪽에 반문하는 것이었다.
『왜,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된 날이 오늘 아닙니까』하고 설명을 덧붙여 주니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해방이요. 해방이야 10월이지요. 10월1일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사가 벌어지지요』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아차」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고 스쳐갔다.
여기는 한국도,북조선도 아닌 중국땅이고 이 안내인 또한 우리와 동족인 조선족이긴 하나 엄연히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이국의 여인이 45년전에 있었던 조국해방의 감격을 체험했을 턱이 없었다.
중국국적으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자라온 이 여인이 말하는 해방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낸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1949년 10월1일 수도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날이었다. 좀 머쓱해 있자니까 이 안내인은 빗나간 질문이 좀 안됐다는 듯 『오늘은 「노인의 날」이야요』라고 덧붙여 주었다. 지역마다 학교운동장에서 조선족들의 경축잔치가 벌어지고 집안식구들이 노부모를 모시고 나와 외식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는다고 했다.
1945년 8월15일의 감격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야 그곳에서는 노인들뿐일 것이다.
이국의 국적인들이 조국의 경축일을 내놓고 공식적으로 기념할 수 없어 노인의 날이라는 명분을 빌려 잔치를 벌이는 그 지혜 또한 절묘하다싶어 가슴 뭉클했다. 백두산 가는 길에 들른 해란강변의 용정에서 색색의 한복차림을 한 조선족들이 노인을 모시고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중간에 국교가 정상화되고 우리 동포들의 지위도 향상돼 이곳 연변에서도 당당히 광복절 행사가 행해질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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