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롱한 문장 빚어내는 '구순의 청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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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맑은 아침 목욕 끝에 거울 앞에 하늑대는/ 타고 난 그대로의 천연의 예쁨이야/ 몸단장하기 이전의 맨얼굴 맨몸일래."

막 목욕을 끝내고 맨 몸으로 거울 앞에 선 미인을 예찬하는 시다. 자못 에로틱하다. 그런데 원 작품은 한시(漢詩)다.

낯선 한시들을 이토록 곱게 우리 말로 옮긴 옛 한시선집인 '손끝에 남은 향기'(마음산책)를 빚은 이는 구순의 한학자 손종섭(89.사진) 선생이다. 100세 때 고대사연구서를 펴냈던 원로법학자 최태영 선생(2005년 타계) 이후 국내 최고령 저자의 한 분인 선생을 8일 오전 경기도 김포시의 자택으로 찾아가 만났다.

"선인들의 한문학은 우리의 정서를 담을 마땅한 '그릇'이 없어 한자로 담아낸 것이니, 마땅히 국문학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1992년 한시 풀이집 '옛 시정을 더듬어'를 시작으로 한시의 현대화에 매진해온 그의 지론이다. 그런데 선생의 이력이 특이하다. 70세 이후 본격적인 저술을 시작했다. 다섯 살 때부터 한학자이던 선친 손병하 옹에게 회초리로 맞아가며 배운 한문학이 바탕이 됐다.

"연희 전문학교를 마친 후 30년 가까이 대구 경북고 등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건강이 나빠져 72년 퇴직했습니다. 그 뒤 병치레를 하다가 70세에 이르러 그간 허송세월이 아쉬워 한문학을 파고 들었죠."

3년간 작업 끝에 '옛 시정…'을 냈고 이후 2~4년 터울로 5권을 쏟아냈는데 선생의 글은 영롱한 문장으로 학계에 정평이 났다.

'미쳐야 미친다' 등 베스트셀러를 낸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2000년 선생의 글에 반해 물어물어 찾아왔을 정도다. 이듬해 선생에게 대학원 강의를 요청하기도 했던 정 교수는 스승의 이번 책 출간도 주선했다. 이번 시집 원고는 본인이 2년 동안 직접 매만졌다. 그래선지 자부심이 대단하다.

"기존의 한시 해제집은 고관대작이나 문사의 작품들을 주로 소개하지만 저는 고려시대 과부 등 무명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발굴했죠"

책에는 신라시대 여류시인 설요(薛瑤)에서 현대의 유학자 고 심산(心山) 김창숙 까지 231명의 작품 280수가 실렸다. 그런데 읽는 맛이 뛰어나다.

'하늑대다(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여 하느작거리는 연약한 모양)' 같은 우리 말, 눈보라에서 빌린 '꽃보라'처럼 지어낸 말도 있고, '잔장(殘粧. 전날 했던 빛바랜 화장)', '선연동(평양 칠성문 밖에 있는 기생들의 공동묘지)' 등 지식을 더해주는 용어들도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시는 옮겨도 시가 되야지 산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란게 그의 소신이다.

손 선생는 지금도 매일 컴퓨터와 씨름한다. "두 번째 책부터 한글 워드프로그램을 이용했는데 아주 편리해요. 요즘은 10년 동안 편지로 한시를 지도해준 모 대학 명예교수가 칠순을 기념해 낼 한시집에 해제를 달아주느라 매일 오전 한 두시간씩 작업을 합니다"

그는 의사인 장남 손영주(64)씨 내외와 살면서 운동 삼아 틈나는 대로 아파트 주변에 꽃을 심어왔단다. 그랬더니 "입주자회의에서 감사패를 준다 하더라"며 밝게 웃었다. 선생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듯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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