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Story] 홍미영 의원의 새·혼·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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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미영 의원 부부와 다섯 딸들.

내 나이 쉰 셋. 큰딸아이는 스물아홉, 둘째 딸은 스물여덟이다. 이 나이에 다시 혼인을 했으니 쑥쓰러울 따름이다.

40대 중반까지도 내 인생에서 이혼과 재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남성 중심 정치판에서 '이혼'이라는 딱지가 주홍글씨인 것을 알기에 어려운 결혼생활도 참아 넘기려 했다. 그러다 끝내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정말 죽지' 싶어 벼랑 끝에서 이혼을 택했다. 물론 '차라리 죽으면 명예롭겠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1년이 지나자 이혼의 심적 고통도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지역 활동을 시작했고, 17대 총선의 비례대표 경선에 나서기로 했다. 이때 큰 조력자를 만났다. 다름아닌 지금의 남편이다. 그 역시 이혼 뒤 딸 셋을 키우고 있었다. 그는 경선 내내 세심한 동지와 보호자 역할을 동시에 맡아 주었다. 드디어 좋은 성적으로 비례순번을 받고 그에게 전화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이제 국회의원이 된 만큼 뒷말이 날 수 있으니 자신과의 만남도 끝내자고. 많이 고맙고 미안했다.

국회의원이 된 뒤 주변에서 전화가 쉬지 않고 왔다. 그의 전화만 없었다. 어느 날 작은딸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요즘 아저씨하고 연락하지 않냐고. 며칠 뒤 그에게도 연락이 왔다. 작은딸이 걱정하기에 전화했다는 것이다. 한사코 마다하는 그에게 후원회장을 부탁했다. 또다시 힘든 역할을 맡아 나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그가 몹시 미더웠다. 좋은 감정이 깊어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실패한 내 인생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와는 주로 내 집에서 만났다. 관계가 진전되면서 딸들에게 허락 받기 위한 일종의 의례를 생각했다. 내 딸들과 두 여동생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소위 언약식을 치렀다. 평소에 애정 표현을 잘 않는 그도 그날만큼은 내 손에 실반지를 끼워주며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이 잔잔하게 떨렸다. 그때부터는 주말에 교회도 같이 가고 사교댄스 강습도 받았다. 저녁도 같이 해먹었다. 이렇게 지내길 한참이 되어도 그에게서는 혼인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막내딸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 재촉하기도 자존심 상하고 나는 나대로 가족에게 미안했다.

그의 막내딸 유학 문제를 내가 도와주고, 그의 어머니를 함께 간병하며 조금씩 거리감을 줄여갔다. 어머니가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어둡고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동지같았다. 수술 결과가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과연 사랑하는가' 하던 얄팍한 저울질, 재혼의 망설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복합가정을 구성하기 위해 가족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전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해소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두 딸도 상담 과정에서 서운한 속내를 드러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뒤늦게 갖는 둘의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딸들의 눈치를 너무 보지 않았다. 결혼을 앞두고 양가 딸들이 상견례를 하면서도 문제가 생겼다. 서로 자신의 딸들이 상대방을 이해 못한다며 다투었다. 초혼 때는 양가 부모의 눈치 보느라 싸우는데 재혼 때는 자식들 문제로 싸운다는 말을 실감했다. 책을 읽고 대화도 나누며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갔다.

고민 끝에 혼인식은 공개적으로 올리기로 했다. 살 집을 구하고 한복도 빌렸다. 가장 신경 쓴 것은 결혼식에서 딸들의 역할이었다. 딸들은 꽃묶음을 들고 씩씩하게 부모들의 혼례길을 열어주었다. 큰딸은 결혼 축하 메시지를 읽었다. "30년 후에도 의좋은 부부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세요. 앞으로의 길, 늘 씩씩하고 행복하세요." 나는 남편과 함께 준비한 결혼 다짐문을 읽었다. "지난날 우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이제 그 상처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 합니다…한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어우러지며 가슴이 울컥했다.

결혼 뒤에도 남편과 함께 상담 교육을 받았다. 교육에서 배운 중요한 메시지는 "사랑하는 것은 결심이다"와 "혼인한 독신 생활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살다 보니 그가 순간적으로 미울 때도 있다. 그때마다 되뇌인다. "그래,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결심이다."

홍미영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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