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20일만의 소복차림(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하얀 면사포의 신혼단꿈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소복을 입어야했던 새색시는 신랑의 영정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8일 오전 10시 강원도 양양군 수산해수욕장에서 물에 빠진 국민학생 형제를 구한뒤 익사한 박중렬씨(34·비디오촬영기사)의 빈소가 마련된 한양대병원 영안실.
『어려운 살림살이에 신혼여행으로 낭비하지 말고 아껴서 하루라도 빨리 내집마련을 하자고 약속했어요. 이번 피서로 신혼여행을 대신하기로 했는데…. 피서를 다녀와서 혼인신고도 할 계획이었어요.』
6년간의 열애,그리고 20일간의 신혼.
박씨의 부인 오수연씨(29)는 아직도 남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듯 넋을 잃고 남편과의 약속들을 독백으로 되뇌었다.
박씨 부부 등 일행 6명이 해수욕장에 도착한 것은 6일 오후 5시쯤.
북적거림과 무더위에 찌든 서울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짐을 푸는 순간 모래사장 저쪽에서 외마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물놀이하다 파도에 휩쓸린 이 모군(9) 형제가 허우적거리며 물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주위의 1백50여 피서객들은 안타깝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옷을 벗어던질 틈도 없이 박씨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50여 m를 헤엄쳐간 박씨가 이군 형제를 모래사장으로 인도하고 빠져나올 무렵 운명의 파도가 박씨를 물속으로 떠밀어갔다.
신혼의 달콤함 대신 남편을 가슴속에 묻는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남편과 영원히 함께 하기위해 장례식이 끝나면 남편이 애지중지하던 무비카메라를 메고 촬영기사로 나서겠습니다.』
박씨 빈소에는 박씨 덕분에 생명을 건진 이군 형제의 가족들중 어느 누구 하나 문상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씨는 남편이 못다 찍은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일들을 렌즈에 담겠다고 했다.<김상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