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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나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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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 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내었다



가벼운 것의 속도. 가느다란 것의 깊이. 바람을 타 넘는 율동. 꽃과 이야기하는 솜씨. 부드러운 구애. 환상을 놓고, 향기를 가로지르는 팔랑거림. 무엇으로 보나 그를 그늘에 둘 도리가 없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탐한다. 어디서나 꽃의 커튼을 연다. 마당에서도 뒤란에서도 해안이나 야산에서도 사랑을 하고 만다. 환한 대낮에. 때로는 차 안으로 날아든다. 이윽고 그때, 비밀이 있은 다음 세상은 만삭이 된다. 꺼내 간 지갑으론 남을 위해 쓰고 손발을 탈탈 턴다.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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