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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세관장|높은 분들「민원」많아“잘해야 본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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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사자밥을 늘 목에 걸고 사는 곳」「시끄럽고 말썽 많은 자리」「잘해야 본전」「관세청 의전관」-. 세관원들 사이에서 김포세관장 자리는 흔히 이렇게 불린다.
그래서 누구도 가기를 달가워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인사운동(?)이라도해 피하려는 자리다.
세관 본연의 임무인「물건관리」는 뒷전이고「사람관리」가 사실상 주된 일이고 보면 하루에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나라의 관문이자 얼굴」이라는 명분까지 감안하자면 힘들고 말많은 사정들이 꼬리를 물수밖에 없다. 그래서 1년을 넘기면『장수했다』는 말을 듣고『뜨면 영전』이라는 김포세관장이지만 이 자리를 거쳐 장관에까지 오른 사람도 있고 쏠쏠한 재미도 없지는 않은 자리다.
김포세관장의 어려움은「소정부」라는 김포공항의 특수성에서부터 비롯된다.
현재 교통부·내무부·보사부·국방부등 11개부처 19개 기관이 상주하고있어 김포세관장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운영의 묘」가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된다.
그러나 각 기관간의 이해가 항상 일치할 수 없고 각종「정보의 생산기」라는 특수한 사정때문에 정보 점유를 둘러싼 신경전이 자칫 갈등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 협조와 융화는 항상 살얼음판같이 위태롭기만 한다.

<재량권 거의없어>
또 김포세관을 장악하는 기관이 김포공항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쥔다는 전통이 올림픽을 전후한 세관통관절차 개선으로 희석되기는 했지만 습관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 세관장의 어려움을 더한다.
세관장은 공항을 거치는 모든 수출입물품과 입출국자를 최종적으로 심사하는 권한을 갖고있다.
사회안정과 국내산업보호라는 커다란 테두리 속에서 세관장 직권으로 검사를 생략하고 통관시킬수도 있고 특정물품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정밀조사를 실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직권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의전에 99점이란 없듯이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대접받은 사람들의 불평·불만은 터무니없이 증폭돼 세관장을 겨냥하게되고 소위 어깨에 힘깨나 주는 사람일수록 섭섭의 도와 세관에 대한 비난이 정비례한다.
49년7월 설치된 서울세관 김포출장소가 김포세관으로 습격된 것이 67년4월10일.
전신인 출장소 시절에는 재무부의 과장급이 출장소장으로 파견 나와 밀수감시와 관세징수등 요즘과 똑같은 기능을 추행하긴 했으나 워낙 국제항공기 자체가 몇대 안돼 출입국자가 적었기 때문에 그 규모는 보잘것없었다.
세관승격과 함께 재무부 세관국지도과장이던 김역수씨가 초대세관장(부이사관급)으로 승진발령 받았다.
출장소시절 70여명이던 직원이 두배로 늘어 1백40명정도, 하루 출입국자가 5백여명이던 시절이었다.
현재의 직원 7백80명, 하루 출입국자 2만여명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
당시 외국나들이를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위있는 사람들이었고 국내물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만큼 휴대품을 규정에 맞게 갖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영국산 양녹지를 5백m나 들고 들어온 사람까지 있어 처리에 애를 먹은 얘기등이 지금도 전해온다.
이렇듯 당시에는 과다물품반입과 밀수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67년 한해에 김포세관에서 적발한 밀수품만 해도 4억5천만원(당시 시가)상당이나 돼 밀수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공항에는 밀수합동수사반이 설치됐다.
그러나 밀수꾼을 잡지 못하면「구멍뚫린 세관」이라는 여론의 질타가 빗발쳤고 반대로 검거하면「세관직원과의 연계성수사」라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김씨는 부산세관장으로 옮겨갔다.
박봉환씨가 2대 세관장으로 취임한 68년도에도 끊임없이 금괴·보석류의 밀수사건이 이어져 세관의 몸수색이 한층 심해졌고 세관의 검색이 끝난 사람도 밀수합동수사반이 다시 데려다가 검색했으며 양화교 검문소에서 다시 검문하는 경우도 있어 입국자들은 2중3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입국자들의 불만이 심해지자 그해 일본으로부터 금속탐지기 9대를 도입,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사치성물품반입이 늘어나고 사회문제화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공무원·국영기업체직원들의 사치성물품은 과세통관도 불허, 압수해 국고에 귀속시키고 해당자는 소속장에게 통보, 인사조치하라』고 특별 지시해 물품반입이 다소 줄어들기도 했다.
당시 세관원들의 위상을 잘 말해주는 일화.
청와대 특별민정반이 김포세관을 비밀감사해 청와대에 보고한 보고서에『세관의 주사·서기급 공무원은 배경이 세기 때문에 세관장조차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어 세관장이 부하직원을 다루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제5대와 12대 세관장을 역임, 처음으로 김포세관장을 두번한 오세영씨는 두번 모두 재임기간이 각각 5개월, 3개월로 단명한 케이스.
5대 때는 그때까지 김포세관이 재무부 직속산하로 있다가 70년 관세청이 생기면서 이동하는 바람에 물러났었고 12대 때는 아무도 김포세관장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힘들지만 다시 맡아달라』는 간청에 못 이겨 잠시 몸담았다.
72년 8대 세관장으로 취임한 안승률씨는 당시「관광입국」을 내세운 정부시책에 따라 나름대로「친절세관」을 목표로 교육에 치중했었다.
세관원들에게「모두가 외교관」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매주 월요일 김찬삼·김형석교수, 김옥길총장등을 초빙, 강연회를 가졌고 세관실용영어와 일어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안씨는 일반인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돼온 세관의 위상을 바꾸기 위해 뮌헨올림픽을 이용, 녹화필름을 신속히 통관시켜주면서「필름통관에 협조해주신 김포세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란 자막을 넣어줄 것을 방송국에 요청, 올림픽기간내내 시청자들이 이 자막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안씨 재임시절에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많았다.

<세관인식개선노력>
당시는 국내산업보호시책에 따라 밀감의 통관을 규제하던 시절이었다.
한번은 재일교포가 부모님선물용으로 밀감20kg을 갖고 왔다가 허용한도가 5kg으로 통관이 안되자 아우성을 치며 밀감을 검사장내에 내동댕이쳐 입국장 바닥에 널린 밀감을 치우느라 진땀을 뺐다. 유치된 밀감이 창고에서 썩는 일도 다반사여서 처리에 곤욕을 치렀다.
또 지체 장애인이 외국에서 구입해 타고 들어오는 휠체어도 과세대상이어서 당사자들로부터『섭섭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엔 입장이 무척 난처했다고 한다.
10대 이봉권씨가 재임중이던 74년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인 문세광이 카셋라디오 속에 권총을 숨겨 입국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 세관에서는 의심나는 전자제품을 직접 작동시켜보는 번거로움을 겪어야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김포세관의 중요성을 높여준 계기가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물동량이 많고 밀수규모도 컸던 부산세관이 더 중요하게 취급됐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김포세관직원도 늘어나고 지위도 격상됐다.
20대인 손호목씨는 공항이 생긴 이후 최대 행사인 IMF총회와 아시안게임을 치러냈지만 폭발물사고로 큰 곤욕을 당해야 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86년9월15일 폭발물사고가 나자 일부에서는 공항을 폐쇄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럴 경우 대내외적인 망신이라고 판단, 공항폐쇄를 막았다.
『공직생활 25년중 김포세관장 시절에 가장 열심히 일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손씨는 「너무 힘들어」아시안게임후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요청했다.
5공주기에 18대 세관장을 지낸 정중렬씨는 손씨가 자청해 물러난 후『올림픽을 대비해 1년만 더 일해달라』는 관세청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21대 세관장에 취임, 결국 올림픽까지 치름으로써 두 번에 걸쳐 만3년간을 재임, 최장수 김포세관장으로 기록됐다.
정씨는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87년12월 폭발물 탐지견 10마리를 처음 도입했으며 컬러 X레이탐지기를 도입, 올림픽에 대비했다.
정씨는 당시 이동호 관세청장의 주도로 검사직원 4백여명 전원을 3박4일간 일본에 견학시킨 것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고 믿고있다.
정씨는 시끄럽던 각 상주기관들이 이때만큼 협조가 잘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당시 모든 기관들이「칭찬받으면 다 받고 죽으면 다 죽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포상주 기관장들은 삼목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아직도 매달 셋째 목요일에 만나 올림픽때의 우애(?)를 다지고 있다.
지난 4월 24대 세관장으로 취임한 변형씨는 마약단속의 중요성과 세관의 사회보호기능을 강조하고 있다.
마약의 침투가 확산되고 밀반입이 늘어나자 차츰 세관에서도 밀수보다 마약에 관심을 두게돼 89년 말에 처음으로 마약계(10명)가 신설되고 90년8월부터는 보세구역내에서 마약수사권을 갖게됐다.

<승진사례 드물어>
변씨는 앞으로 모든 세관원이 마약전문가가 돼야한다는 생각에서 7월초 마약계 요원을 15명으로 늘리는 한편 올해 안에 총9명을 미국과 홍콩의 마약전문기관에 보내 전문가로서의 교육을 받게 할 계획이다.
김포세관장 출신들은「잘해야 본전」이라는 말 그대로 퇴임후에는 대부분 관세청 본청 국장으로 되돌아갔으며 승진한 케이스는 드물다.
2대 박봉환씨가 유일하게 80년대 동자부장관까지 올랐다가 현재 손해보험협회회장으로 있는 정도며 세관장출신 21명중 퇴직 후 관세사로 일하는 사람이 4명, 재무부 .관세청등 현직에 있는 사람이 4명이다.
2명은 이미 작고했으며 4명이 관우회 임원 또는 개인사업을 하고있고 나머지는 완전 은퇴해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비록 출세가 보장되는 자리는 아니지만 국장급으로는 유일하게 3부요인과 국빈들을 직접 상대하며 이들로부터 인사받는(?)자리라는 점과 양주가 귀한 선물이던 시절에 양주쯤은 쉽게 조달할 수 있을 만큼 쏠쏠한 재미도 없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손장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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