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 가치있다” 처형 모면/확실히 밝혀진 「춘원의 최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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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혹한속 끌려가다 지병악화/인민군 병원 입원전 홍명희 집에서 치료받기도
춘원 이광수는 납북되기 직전 매우 불우한 상황에 있었다. 일제때의 친일활동으로 반민특위에 끌려나가는 수모를 겪었고 스스로 반성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또 건강도 나빠 지병인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다.
춘원 가족들에 따르면 그가 납북된 것은 50년 7월12일 아침이었다.
자택인 서울 효자동에는 춘원을 비롯해 부인,장녀 정란씨(당시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 1년),차녀 정화씨(이화여고 1년) 등 3명이 있었다.
외아들 영근씨(당시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2년)는 전쟁이 터지자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부친이 끌려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북 사투리를 쓰는 20대 인민군 3명이 총을 들고 나타나 폐결핵으로 누워있는 춘원에게 『당신이 소설가 이광수냐』고 묻자 춘원이 『그렇다』고 대답,『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어디론가 끌고 갔었다는 것.
작년 8월 오빠 영근씨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던 차녀 정화씨는 『아버님이 납북되실때 어머니(허영숙·의사)가 아버님을 붙잡아 가는 인민군들에게 자꾸만 절을 하자 인민군들은 「절은 봉건주의 사상」이라며 쏘아 붙였다』면서 『아버님이 어머님의 절은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뜻이지 봉건주의가 결코 아니라고 인민군들을 타이르셨다』고 납북당시를 회상했다.
정화씨는 이어 『이 광경을 지켜본 저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며 눈물이 자꾸 쏟아져 얼굴을 뒤로 돌리고 있었다』며 『그게 제가 뵌 아버님 춘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알마아타에 거주하는 전 북한 문화성부상 정상진씨에 따르면 이렇게 끌려온 춘원은 평양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북한정권은 유엔군의 진공으로 평양을 후퇴하게 되자 조만식 선생등 다른 인사들을 처형하면서도 이용가치를 고려해 춘원등 일부인사들은 살려두었다는 것이다.
정씨가 듣기로는 당시 춘원은 평양에서 강계까지 도보로 끌려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병약한 체질에 동상까지 걸려 그런 상태로는 도저히 강계까지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위로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모르나 인편으로 사신을 홍명희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편지를 받은 홍은 춘원을 자기집에 데려가 치료해줬다는 것.
그렇지만 당시 외무성부상이었던 박길용 박사는 춘원이 홍의 집에 있다가 강계에서 15㎞ 떨어진 인민군병원에 입원했으며 결국 그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춘원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춘원은 50년 7월 중순쯤 개성·사리원을 거쳐 8월4일 새벽 평양 구교화소내 3평짜리 감방에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60년대 한 귀순자로부터 전해들었다고 한다.
영근·정화 오누이는 지난해 서울방문때 기자회견을 통해 『30여년간 전가족이 아버지의 납북행적을 추적했으나 모두 허탕이었다』며 『평양을 가서라도 아버님의 탄생 1백주년인 92년까지 생사만이라도 꼭 알아올 각오』라고 굳은 의지를 밝혔었다.<김국후특파원>
□이광수 연보
▲1892년 평북 정주 출생
▲1910년 일본 명치학원 졸업
▲1915년 일본 와세다(조도전)대 철학과 입학
▲1917년 최초의 단편 『소년의 비애』『어린 벗에게』발표. 최초의 장편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
▲1919년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 작성. 대학중퇴후 상해임정서 활약
▲1922년 『개벽』지에 논문 민족개조론 발표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수감
▲1939년 조선문인협회장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각지를 돌며 친일연설
▲1949년 반민법에 의해 구속중 병보석
▲1950년 7월12일 납북
▲1950년 12월 초순 북한 만포인민군병원에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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