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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헛물켜는 학원단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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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4일 오후 9시50분쯤 서울 강남구 대치동 H학원 앞으로 중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나온 Y중 방모(13)군은 "원래 학원에서 자정까지 자율학습을 하는데 오늘은 빨리 간다"고 좋아했다. '강남 학원과의 전쟁'을 선포한 서울시교육청 단속반원들이 들이닥치기 10분 전 학원 측이 심야교습 단속에 걸리지 않도록 학생들을 서둘러 내보낸 것이다. 이곳의 학원장들은 단속반원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뭘 잡아보겠다는 건지…"라며 혀를 끌끌 찼다.

길 건너편에서 K국어학원을 급습한 단속반원들은 "개인과외 교습자들이 합법적으로 교습하는 교육원"이라는 핀잔을 듣고 철수해야 했다. 단속팀장은 "이름은 학원인데, 개인과외 교습자가 가르치네"라며 "합법적인지 법령을 찾아보고 다시 와야겠다"고 말했다.

불법 과외.학원과의 전쟁은 이처럼 첫날부터 비웃음거리가 됐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싸움을 연상케 할 정도니 단속의 실효를 기대하긴 어려울 전망이다. 학원 측의 광고 전단지만 갖고 단속하려니 성과가 있을 턱이 없다. 오히려 강남 일부 학원의 수강료가 과목별로 매겨져 있는 게 아니라 '문제 풀이.특강'식으로 세목별로 돼 있는 걸 발견한 단속반원들은 위반 여부를 가리지 못해 진땀을 빼는 모습이었다.

먼발치에서 단속반원의 활동을 지켜보던 유인종(劉仁鍾) 서울시 교육감은 "그래도 전등불은 껐지 않느냐"며 "이 정도도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과연 그럴까. 그동안 충격요법식 단속에 내성이 생긴 강남 학원가에서는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간 교육당국이 강남 사교육시장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고액 과외를 조장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강홍준 정책기획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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