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연륜의 멋…김수근의 '空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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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여름이면 무성한 청록색 담쟁이가, 늦가을이면 바스락거리는 갈색 담쟁이 덩굴이 담을 빽빽하게 덮어버리는 벽돌 건물. 서울 종로구 원서동 219번지 공간사옥은 건축전문가들이 손꼽는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작이다.

건축가 김수근(1931~86)이 71년 지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펴다 갔던 이곳은 또한 70년대와 80년대에 공간 소극장과 잡지 '空間'의 산실로 한국 문화와 예술이 꽃핀 정신의 집이었다. 김수근이 쉰다섯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뜬 뒤 그의 제자 장세양(47~96)은 스승의 분신 같은 그 건물 옆에 투명한 유리집을 덧붙여 세월을 이어가는 건축물의 역사를 일궈냈다.

건축비평가 전진삼(간향미디어랩 소장)씨가 기획한 '건축의 바다 총서'여섯권째로 나온 '공간사옥'은 30여 년에 걸쳐 지어진 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기록이다. 이 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빛과 때와 곳을 찾아 2년여를 바친 사진가 조명환씨의 노고에 힘입은 건축사진들은 독자들 눈을 단박에 사로잡는다. 사진 사이사이에 붙은 짤막한 한마디 속에 두 건축가의 혼이 살아난다.

"김수근 건축의 벽면에는 단지 담쟁이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개구부를 통하여 공간의 깊이를 확인케 하는 디테일한 공간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장세양의 공간 신사옥이 투명성을 통하여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같은 스승의 건축을 되밟는 것이다."

편집자인 전진삼씨는 책머리에 김수근과의 가상 인터뷰를 실어 고인의 뜻을 되새기고 있다. "집은 오래오래 지을수록 좋은 집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집이란 마치 수목과 같아서 연륜이 두터워질수록 멋이 더하는 것입니다. 건축도 신진대사와 변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은 새로운 세대의 변혁과 새로운 인간의 요구를 부단히 만족시킬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던 그는 그 여유를 나누어줄 새도 없이 일찍 갔다.

건축비평가 김정후씨와 박길룡씨가 쓴 글과 부록으로 붙은 45쪽에 달하는 설계도는 건축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 여유를 찾는 하나의 나침반이 될 듯하다. 02-737-393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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