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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한인 무용수 '절망 딛고 희망을 춤춘다'···뇌종양도 넘는 '댄스의 열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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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중앙

펄 워드로가 (댄스 스펙트럼 인 보몬트)에서 아이들에게 발레 기본동작을 가르치고 있다. 백종춘 기자

미운 오리 새끼에서 우아한 날개짓의 백조로 변신 LA동부 지역 사회에서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입양 한인 무용수 펄 워드로의 32년 인생을 채운 감정과 사건들이다.

74년 LA에서 태어난 그는 곧바로 돌로레스와 루이스 델가디요 가정에 입양됐다.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몰랐다. 친구들이 아시안이라고 말해도 멕시칸이라고 우겼다. '나는 같은 피부색과 처진 눈을 가진 멕시칸 아버지의 딸인데 왜 다들 내게 아시안이라고 할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이이었다. 그 사실을 6학년이 돼서야 알았다.

당황했다. 울었다. 펑펑.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유학생이었다. 유학시절 만난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한살 위 오빠와 자신을 낳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결혼해 한국에도 가정이 있었다. 게다가 학생비자가 만료돼 불법으로 체류하던 터였다. 자녀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어머니와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지금의 어머니가 입양 의사를 밝혔다. 그는 그렇게 생모에게서 버림받았다.

오빠가 있다는 사실은 16살 때 알았다.

분노했다. 입양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동안 자신에게 말하지 못했던 부모를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처럼 멕시칸 가정에 입양됐던 오빠의 존재도 모른 채 살아온 것이 한스러웠다.

성인이 돼서 만난 오빠와는 현재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어색하지만 그래도 그가 있어 든든하다.

낳아준 어머니. 수소문도 해보고 직접 한국으로 날아가 찾아도 봤지만 헛수고. 다행히 친아버지와는 오빠를 통해 연락이 닿는다.

어려서부터 그는 춤을 좋아했다. 춤은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가족 모임이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진해서 춤을 췄다. 그리고 미국내 무용 전공 톱이라는 UC어바인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양된 가정 형편도 넉넉치 않았다. 그가 입양되기 직전 양아버지가 직장에서 두 손을 잘리는 사고를 당해 일을 할 수 없던 처지였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디즈니랜드에 들어가 춤을 췄다.

하루 3시간 자며 새벽부터 나가 리허설에 참가했고 일이 끝나면 바로 강의실로 달려가기 바빴다.

학비를 줄이기 위해 한 학기 20학점 넘게 들으며 3년만에 졸업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오빠와도 연락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결혼 직전 또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뇌종양 선고. 결혼을 앞두고 설레임에 부풀어 일생 최고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했을 즈음이었다.

절망했다. 하지만 그에겐 춤이 있었다. 힘든 순간순간에 그를 버티게 해준 것은 다름아닌 춤이었다. 화학요법으로 뇌종양을 치료하며 99년 샌버나니도 카운티 보몬트에 술집을 개조해 '댄스 스펙트럼 인 보몬트'를 오픈했다. 보몬트의 첫 댄스 스튜디오였다.

현재 앙상블을 구성해 각종 커뮤니티 행사에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는 무료로 춤을 가르친다. 장학금도 준다.

짧다면 짧은 32년. 펄 워드로는 "입양도 어려운 가정 형편도 뇌종양도 춤에 대한 내 열정은 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펄은 98년 채드 워드로와 결혼해 샐라(3살) 클로에(4개월) 두 딸을 두고 있다.

[USA중앙] 이재희 기자 jhle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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