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1월 25일. 일본에서 '노벨상을 받지 못한 노벨상급 작가'로 추앙받던 미시마는 추종자 4명과 함께 육상자위대 총감부에 난입해 평화헌법 개정, 천황제 실시를 주장하며 자위대 궐기를 부르짖다 할복자살, 전세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사무라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칠생보국' 글자가 적힌 머리띠를 두른 그는 이 연설을 남긴채 1000여명의 자위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준비한 일본도로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수가 목을 쳐주었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방식이었다.
1925년 도쿄에서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미시마는 일찍부터 문재를 인정받았다. <가면의 고백><금각사>등 수작을 계속 발표해 일본에서는 '전후 최대의 작가'란 평가를 받으며 노벨상 후보에도 올랐다.금각사>가면의>
그의 자살 이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해 노벨상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돌아가 그에 대한 예술적 좌절도 한몫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