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사건 과연 희생양인가|이철희"때 되면 진상 밝히겠다" 큰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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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어음 사기극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되돌아보면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사건의 주역이 돼야 했어요…』
구속 9년1개월 만인 지난달 25일 가석방으로 풀러난 이철희씨(68)는 사건당시를 떠올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유를 말할 때가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밝혀질 것입니다.』
건국이후 최대의 경제사건으로 일컬어지는 82년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
이씨 가석방으로 이 사건의 진상과 발생 배경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으나 이씨는 『아직 때가 아니다』며 여운만 남겼다.
이씨가 말하는「때」가 부인 장씨 출소이후일지 6공 이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폭탄성 발언도 나올 수 있어 또 다른 파란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
이씨는 지난달 25일 출소한 직후 청주시 영운동118 정화아파트 가동201호 방 한칸을 보증금 2백만원·월5만원에 세를 얻어 비서겸 기사와 함께 지내며 장씨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
『어쩠든 국민들에게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82년3월 집사람과 미국여행 중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교포로부터 40만 달러를 빌려쓰고 국내에서 이를 한화로 갚아 외환관리법을 위반했다는 부분은 지금도 시인해요. 물론 잘못 된 일입니다.』
이씨는 81년6월 미 앨라배마 주지사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실업인과 합작투자를 협의하던 중 사탕수수밭에 쌀 농사를 짓기로 결심, 농기계구입·수로개설 등을 위해 1백만 달러가 필요했었다고 했다.
30만 에이커에 이르는 사탕수수밭을 경작하는데 3년에 한번씩은 다른 작물을 재배해야돼 매년 10만 에이커의 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당시 이를 위해 경제기획원과도 수 차례 협의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씨는 1천8백억원에 이르는 어음사기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과장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그 같은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결제해 완결된 상당액이 포함돼 있어요. 당시 구속사태가 없었다면 아무 문제없이 모두 해결됐을 것이며 그만한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씨가 이처럼 큰소리 칠 수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국 곳곳에 많은. 부동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파악되고 있는 이-장 부부의 재산만도 가위 천문학적인 규모다. 이중 확실히 드러나 있는 것이 조흥은행에 담보물로 설정돼 있는 부동산들이다.
이들 부부는 ▲제주 성업목장 2백95만평 ▲경주시 구정동 공원용지 26만평 ▲구리시 아천동 임야8만평 ▲서울 평창동 대지 및 임야 6천평 ▲부산 중동 대지 및 임야 3천2백평 ▲부산 범일동 대지 2천5백평 ▲서울 논현동 대지 4백1평 ▲서울 청담동 대지 1천3백평 ▲서울 충정로3가 대지 2백9평등이다. 정확한 평가는 어려우나 수천억원 대에 이른다.
이씨는 이중 서울에 있는 땅들은 회사사옥 등 건물을 짓기 위해 사 둔 것이며 논현동 대지의 경우 집을 지어 이사하려고 구입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이들 부부가 안고있는 부채는 일신제강이 이 부동산들을 담보로 조흥은행으로부터 융자받은 원금 2백30억원, 그 동안의 이자 3백80억원 등 6백10억원과 강남세무서에 체불돼 있는 소득세 3백30억원 등 9백40억원 가량.
그러나 이 부동산들 중 지난해 3월 남제주군 측이 지금까지 체납된 지방세 3억3천8백만원을 징수키 위해 성업목장 2백97만평 중 2만6백14평을 성업공사에 의뢰, 공매 처분했을 뿐 나머지 부동산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어 이들 부부가 성업목장 등 2∼3개의 부동산만 처분해도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
이들 부부가 소유하고 있는 강남 땅만 해도 평당 1천만∼2천4백만원에 이르고 있는 데다 경주시 구정동 땅은 일대에서 온천이 개발돼 지가가 크게 올랐으며 구리시 아천동 땅의 경우도 한강변 별장지 여서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장 부부는 3백30억원의 소득세부과와 관련, 이미 강남세무서를 상대로 소득세부과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법원에 내놓고 있어 최소한 일부 승소판결만 내려져도 채무부담은 그만큼 가벼워질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저는 정년도 되고 개인회사에 취직하려해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여생을 국가에 봉사하려고 생각했지만 경험이 없었지요. 따라서 독자적인 전자산업·기계산업·해외자원개발 등과 함께 중동의 오일달러를 끌어들여 합작은행을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갖고 있던 자금을 다 투입할 수도 없어 어음거래를 한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세울 단계가 아닙니다. 집사람이 관정맥 3개중 2개가 폐쇄돼 있는 등 중병을 앓고 있으나 치료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만큼 옥바라지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법무부나 교도소 측에서 집사람의 병세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시설 좋은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최근 경북대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실시한 결과 자신도 고혈압·위장병·백내장 등 병세가 악화돼 의사로부터 입원치료를 받도록 권유받았으나 아내의 옥바라지를 위해 청주로 왔다는 이씨는 장씨 출소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계획이라고 말했다.
남녀가 함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여자부터 구하는 것이 도리인데도 자신만 먼저 석방돼 죄스런 생각이 든다는 이씨는 주1회 장씨를 면회하고 있지만 서로 눈물만 흘릴 뿐 말을 나누지 못한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무엇보다 나로 인해 유형무형의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기 전 다른 기관에서 조사를 받으며 그 동안 접촉해 온 인물들을 밝히라고 강요받았습니다. 그 부분은 말씀드리고 싶지 않지만 저와 알고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누구라고 밝힐 수 없지만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이씨의 말대로 9년 전의 이·장 부부 사건이 어떤 각본에 의해 연출된 사건인지, 아니면 단순 경제사건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66)까지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고 이씨가 장영자씨의 형부라는 점에서 시중에 끈질기게 나돌았던 청와대 내 주도권 쟁탈전등의 실상이 어떤 바람을 몰고 드러날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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