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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폭력 원양어선 시끄럽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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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태평양등 망망대해로 출어에 나선 원양어선에서 선상반란이 잇따르고있다.
군대식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통하는 원양어선에서 최근 선장 등 간부와 하급선원간의 집단편싸움, 하급선원들의 간부 감금·폭행 등이 빈발, 어로를 중단한 채 회항하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고있다.
선상난동은 선장이 선원들의 머리를 강제로 삭발하는 등 가혹행위가 있는가 하면 하급선원들이 선장을 감금, 폭행하면서 도끼로 허벅지를 찍어 중상을 입힌 뒤 며칠씩 결박해 놓는 등 극단적인 무자비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고있다.

<실태>
『생각조차 하고싶지않은 지옥같은 선상생활이었습니다. 폭언과 폭력이 난무하고 손이 부르트도록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예생활과도 같았습니다.』
지난달18일 북태평양 하와이근해에서 조업 중 선장을 비롯한 간부 등을 쇠파이프 등으로 집단구타, 감금하는 등 선상반란을 일으킨 뒤 2일 부산으로 배를 강제로 되돌려온 부산시 중앙동2가24 은희수산소속 오징어유자망어선 88스텔러호(2백59t·선장 김정도·42)의 갑판원 김정삼씨(22) 등 하급선원 10명은 경찰에서 한결같이 『살기 위해서 선상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들 선원들은 4월3일 부산항을 떠난 후 1주일이 지나자 선장 등이 작업이 서투르다며 욕설과 구타를 일삼아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껴 선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지난달 7일 하와이 부근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던 부산시 충무동 동화수산소속 오징어유자망어선 102화동호(2백9t·선장진한규)의 갑판원 홍충광씨(40·서울답십리1동102의10) 등 선원 6명도 손도끼·식칼·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채 선장 등 간부11명과 대치극을 벌이는 등 선상난동을 하다가 지난달 24일 운반선편으로 조기 귀국했다..
이들 선원들 역시 작업도중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간부들이 대나무로 내리치는 등 잦은 폭행과 폭언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 남태평양상에서 고기잡이하던 세인트빈센트국적 원양참치연승어선 파라독스506호(4백24t)의 갑판원 박동진씨(26) 등 한국송출선원 24명이 선장 강태금씨(42·서울시 개포2동 우성아파트802동201호) 가 머리감을 물이 모자란다고 강제로 머리를 삭발시키고 개는 목욕시키면서 선원들은 세수도 못하게 하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에 반발, 선장을 집단 구타하면서 도끼로 때려 중상을 입힌 뒤 1주일간 선장실에 감금하는 등 선상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 같은 선상반란·난동사건은 최근 발생한 몇몇 예에 불과하며 실제 원양어선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은 관계기관에 신고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한해동안 부산지방 해운항만청에 신고된 원양어선 선상폭력사건은 11건.

<선장등 감금까지>
또 지난 한해동안 국내외 해역에서 숨지거나 실종된 것으로 부산지구 해경에 신고된 선원 3백22명중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1백97명과 올 들어 6월말까지 접수된 변사 및 실종선원 1백87명중 상당수가 선상폭력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지난해 6월18일 태평양상에서 조업 중이던 부산선적 원양오징어 유자망어선 제21성룡호(2백98t) 선원 이기종(22)·황주연(21)씨 등 2명은 『폭행과 폭언이 난무하는 힘든 선상생활을 견디지 못해 탈출해야겠다』는 내용이 적힌 일기장을 남긴 뒤 실종된 것으로 밝혀져 원인불명 실종선원들의 상당수가 선상폭력을 피해 탈출했거나 자살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고있다.

<문제점>
원양어선의 잦은 선상폭력은 대부분 열악한 어로환경에서 힘들게 일하는 선원들끼리의 인간관계 불협화음에서 비롯된다는게 일반적인 견해다.
연근해어선이 길어야 한달가량 조업하면 육지로 돌아오는데 반해 원양어선의 경우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0개월동안 가족과 떨어져 망망대해에서 생활하는 등으로 타직종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게다가 8백여척의 원양어선 대부분이 건조한지 20년이 넘는 노후선박이어서 근로·주거조건이 열악한데다 고기를 많이 잡을수록 급여가 많아지는 생산수당제 또는 도급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쉼없는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선장 등 간부들의 하급선원에 대한 무리한 작업지시와 함께 선 내 질서유지명목으로 무조건 복종을 강요, 하급선원들과의 마찰을 빚게 된다는 것이 원양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최근 들어 육상사업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원양어선원 구인난이 심화되면서 무경험자들을 마구잡이로 승선시켜 이들이 배멀미와 고된 노동에 적응하지 못해 중도하선을 요구하기 일쑤다.

<복종강요로 마찰>
특히 난동에 가담하는 선원들은 대부분 승선경험이 적은 초보자들로서 거친 작업과 나쁜 처우, 엄격한 위계질서등 선상생활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없이 원양어선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기대만으로 승선했다가 좌절하는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이들 선원들은 『1∼2년의 계약기간을 끝낼 경우 수천만원의 목돈을 손에 쥘 수 있고 해외입항을 통해 견문도 높일 수 있다』 는 선원 취업브로커들의 과장된 선전에 현혹돼 승선했다가 막상 출항해보면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진 생활에 접하게 되어 선장 등 간부선원에게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하다 거절당해 난동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원양어선 선장들은 이들의 하선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조업이 불가능해져 이를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선상반란으로 말썽을 빚은 은희수산 소속 88스텔러호의 경우 선원 25명 가운데 하급선원 16명 모두가 기초교육도 받지않고 선원수첩도 없이 부산항을 출항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국 원양수산노조 자체조사결과 지난 4월 출항한 북양오징어유자망어선 1백30여척의 하급선원 80%가량이 승선경험이 전혀 없는 신규선원들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기초교육과 안전교육을 받지 않고 출항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무자격자가 마구잡이로 승선하는 것은 불법 선원브로커 조직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나 선주들은 『워낙 인력이 부족해 이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선원브로커들은 1명을 충당시키는데 20만원씩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
「선상난동」은 본질적으로 선원의 구인난이 해소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게 원양어업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현재 원양업계에서는 구인난에 따른 1∼2주의 출어지연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다수 업체들은 출어를 앞두고 전사적으로 선원모으기에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만 심한 경우에는 1개월 가량 「지각출어」 까지 겪고 있다.
이같은 구인난은 원양어선승선이 육상근무보다 임금등에서 장점이 없어 희망자가 적은데다 출어에 나섰던 선원들 대부분이 다시 승선하기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원양어선의 선원들은 월48만원의 기본급에다 생산수당(보합금) 등을 포함, 월평균 60만∼1백만원의 급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7천여명이 부족>
한국선원인력관리소에 따르면 90년 어선원의 이직률은 48·5%이며 하급선원의 경우에는 6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원양어업협회에서는 현재 부족한 어선원을 약7천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양어업협회는 어선원난 해결을 위해 현재 외국선원 수입과 병역특례 확대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선원수입에 대해 원양수산 노조측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조천복원양수산 노조위원장은 『임금·근로조건·주거환경·근로시간 등의 개선 없이 일방적으로 외국선원 고용문제를 주장하고 나서는 것은 노사공존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자들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원급료인상·복지시책 등 선원에 대한 처우개선이 선행돼야 하며 현재 난립하고 있는 무허가 선원 소개업체에 대해 양성화든, 전면정리든 뚜렷한 방침이 정해지고 공식선원 수급기관인 선원인력관리소의 위상이 강화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연간 3만여명이 넘는 해외송출선원의 송출억제 등이 이뤄져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수산학교에 대한 지원과 어업장비의 자동화 등이 실현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강진권·이영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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