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털어 위기탈출 … 4년째 흑자 행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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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쓰나미'에 휩쓸린 쌍용건설은 난파선이었다. 직원들은 정리해고와 인수합병에 벌벌 떨었고, 온몸으로 쓰러지는 회사를 떠받쳤다. 그들은 똘똘 뭉쳤다. 퇴직금까지 쏟아부었다. 기업을 망친 것도 사람이었고 망해 가는 기업을 구해 낸 것도 결국 사람이었다. 쌍용건설 직원들의 10년 기록을 통해 캄캄한 어둠 속을 헤쳐 나온 2000만 명 근로자들의 외환위기 극복기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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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건설 건축영업부 박영진(38) 과장은 28일 결혼했다. 1997년 입사한 동기 30여 명 중 마지막으로 총각 신세를 면했다. 그는 청첩장을 돌리면서 "회사를 정상화시키느라 결혼이 늦어졌다"고 인사했다. 듣는 동료도, 말하는 박 과장도 외환위기 10년을 견뎌낸 아픔과 희망을 떠올렸다. 쌍용건설은 지난 10년간 죽다가 살아났다.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살벌한 구조조정 끝에 4년 연속 흑자를 내는 알짜 회사가 됐다.

곤두박질 박 과장이 입사할 당시 회사는 짱짱했다. 재계 5위 쌍용그룹의 주력 계열사였고 해외 고급 건축물 시공실적 1위를 자랑했다. 그의 입사동기인 남현석(37) 과장은 "입사 경쟁률만 수백 대 1이었다"며 "당시 최고수준인 연봉 1800만원에다 입사 첫해에 해외연수까지 약속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쌍용건설이 기우뚱거린 것은 97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닥치면서부터다. 계열사인 쌍용자동차 채무 1800억원을 떠안으며 98년부터 유동성 위기에 휘말렸다. 박 과장은 "불과 1년 만에 연봉이 절반가량 깎였고 750%였던 보너스는 한 푼도 안 나왔다"고 했다. 한번에 100여 명의 명단이 담긴 노란 봉투의 '퇴직 권고서'가 날아들었다. 2400여 명이던 직원수는 2000년에 700명으로 3분의 1토막 났다.

분양관리부 신현복(36) 팀장은 "다른 부서에 전화하기가 두려워 직접 찾아가야만 했다"고 말했다. 담당자가 퇴직한 경우가 워낙 많아 직접 찾아가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남은 직원들도 청약예금을 해약하고 자녀들의 학원까지 끊기 일쑤였다.

당시 한 직원이 '무지개'란 필명으로 사내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딸 생일에 주머니를 뒤져보니 1000원짜리 한 장과 100원짜리 몇 개밖에 없었다. 문방구에서 딸아이가 사달라던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 초만 몇 개 사고 나왔다. 초코파이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데 어느새 온 가족이 목놓아 울었다."

똘똘뭉쳐 쌍용건설은 99년 3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살기 위해 새로 일감을 따내야 할 절박한 사정인데도 채권단은 돈줄을 꽉 죄었다.

도시개발사업부 이병만(44) 차장은 "2001년 부천 재건축 사업을 따기 위해 오전 6시부터 현장을 누볐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말했다. 경쟁사가'쌍용건설=부도회사, 부채비율 9999%'란 대형 현수막을 내걸자 주민들이 등을 돌렸다.

"한 노인이 다가와 '젊은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어디 부도회사가 사기를 치려고 해'라고 호통을 치더군요. 해명할 엄두도 나지 않아 겨울 바람을 맞으며 눈물만 흘렸습니다."(박호석 팀장)

해외현장에서도 눈앞에서 아까운 일감을 놓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2001년부터 두바이에서 새 일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보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발을 굴렀습니다."(해외건축부 백휘 부장.46)

어려움을 겪을수록 쌍용건설 직원들은 똘똘 뭉쳤다. 2001년 5월 서울 내수동의 주상복합아파트 프로젝트는 다시 자신감을 찾는 계기였다. 어려운 입지였지만 사흘 전부터 대기자가 줄을 서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미분양 아파트가 술술 팔렸고 해외에서도 승전보가 줄을 이었다. 인도에서 5건의 고속도로 공사 중 4건을 쌍용건설이 싹쓸이했다.

이런 성과가 시장에 인식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2003년 3월 쌍용건설은 '2년 연속 50% 이상 자본잠식=퇴출'이란 규정에 걸려 코스닥시장에서 퇴출될 위기를 맞았다. 직원들은 다시 뭉쳤다. 퇴직금 중간정산을 통해 320억원을 마련,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그것도 시가(2600원)의 두 배인 액면가(5000원)로 들어갔다.

김성한(42) 노조위원장은 "전 직원 700여 명 중 6명만 빼고 퇴직금을 몽땅 털어부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쌍용건설은 2003년 흑자를 냈다. 이듬해 5년8개월간 회사를 짓눌렀던 워크아웃에서도 벗어났다.

다시희망 "회사가 요즘 월급을 너무 많이 주는 것 아냐?" "1.11 부동산 대책으로 지방 미분양이 늘어날 것 같은데…." 쌍용건설 직원들이 요즘 주고받는 말이다. 외환위기를 이겨내면서 직원들이 2대 주주(18.9%)로 회사의 주인이 된 것이다.

외환위기가 바꿔놓은 것은 이뿐 아니다. 이병만 차장은 "적어도 세 사람 몫은 해야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생산성이 높아진 것이다. 쌍용건설은 지금 인수합병(M&A)을 통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이 50.1%의 지분을 올해 안에 매각한다. 그러나 직원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경영권이 어떻게 되든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요즘 새신랑인 박영진 과장은 내집 마련을 꿈꾸고 있다. "빨리 신도시 청약에 당첨됐으면 좋겠다"는 그의 환한 웃음에는 고난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법한 자신감이 엿보인다.

함종선 기자



회사 떠난 이들은 …

교수 변신 … 문구체인점 운영 … 대리운전 …

'타의'에 의해 쌍용건설을 떠난 이들은 대개 다른 건설업체에 새 둥지를 틀었다.

1994년 싱가포르의 NEW KK병원 현장소장을 지낸 양재건(57)씨는 현재 건설사업관리(CM) 회사인 한미파슨스 전무다. 양 전무는 "쌍용건설을 떠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며 "평생 직장을 등질 때의 심정은 무척 괴로웠다"고 말했다. 석호태(41)씨는 전공을 살려 영남대 건축학과 교수로 변신했다.

다른 업종으로 이직한 경우도 많다. 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해외 건설현장을 누빈 강영준(51)씨는 분당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다 문구체인점 사장이 돼 있다. 그는 "고생도 많았지만 이젠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김철수(47)씨는 쌍용자동차 영업소장으로 옮겼다. 김 소장은 "주인은 다르지만 쌍용이란 이름은 여전히 애틋하다. 영업하면서 옛 직장 동료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근무한 신모(45)씨는 대리운전을 하면서 새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다. 신씨는 "나이가 좀 들었지만 건설업체 경력사원 채용 때마다 응시원서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함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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