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아가씨와 선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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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물론 다 그렇진 않았다. 교태와 미색으로 사내들을 홀린 기생이 더 많았다. 그에 놀아나는 양반 관료들의 작태를 세종 즉위 초 문신 윤곤이 고발한다. "대소 사신이 외방에 나가면 관기(官妓)에 빠져 직무를 전폐하고 욕심껏 즐긴다. 기생이 맘에 안 들면 유능한 지방 수령이라도 죄를 찾아내 벌한다. …한 고을 명사들이 기생 하나를 놓고 다퉈 앙숙이 된다."

대책을 세우라는 어명이 떨어지지만 20여 년이 지난 뒤 세종이 "관리가 기생 집에서 자는 것은 실로 더러운 행동이나 그걸 보통으로 여긴다"고 개탄하고 있는 걸 보면 별 효과가 없었던 듯하다. 기생 출신 애첩 장녹수에게 놀아난 연산군에게 덴 사림(士林)들의 주장에 따라 중종 때 잠시 관기 제도가 없어지지만 결국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기생이 아닌 사림들이었다.

조선 말 기생을 관리하는 교방(敎坊)이 해체된 뒤에도 기생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자유 직업인이 됐다. 명월관.태화관 등 고급 요릿집이 활동무대였다.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기생들을 태워 온 인력거를 댈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다. 문호(?)도 널리 열렸다. 가난한 처녀가 생계를 위해 수업을 받고 기생이 되기도 했다. 지주나 부호의 첩이 돼 노부모를 부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기생도 있었다.

뜬금없는 기생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시대에도 여기저기서 때아닌 '기생별곡'이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차별을 없애자는 시대정신을 따라선지 남자 기생들(?)의 목소리도 우렁차다. 정보기술(IT) 강국답게 인터넷을 통해서다. 포털사이트마다 룸살롱 등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인터넷 카페가 여럿이다. 그중 한 카페는 회원 수 20만 명이 넘는다. 여기서 룸살롱에 나가는 여성은 '아가씨', 호스트바에 나가는 남성은 '선수'로 통한다. 아가씨와 선수들이 직업전선에서 겪는 애환을 토로한 '아가씨 일기' '선수 일기'가 특히 인기 코너란다. 카페에는 아가씨와 선수들이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자신을 시장에 내놓는 게시판도 있다.

어쩌면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음습한 그늘에서 걸어나와 떳떳하게 자기 권익을 추구하는 밝은 측면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에 수많은 아가씨와 선수 지망생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돈이 급하거든요. 한두 달만 할 수 있을까요. 얼굴은 보통인데 성형 수술을 해야 하나요." "키는 1m80㎝, 나이는 20세이고요. 호스트바에서 일해 보고 싶습니다. 돈은 얼마나 버나요." 그들의 희망은 월수 2000만~3000만원이라는 이른바 '텐프로(상위 10% 안에 드는 고급 룸살롱)'에 나가는 것이다. 거기서 한몫 챙긴 뒤 그 생활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다행히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선배들의 충고가 뒤따른다. 그러나 당장 돈이 필요한 지망생들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지 의문이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젊음이 오늘도 유흥업소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지 딱한 노릇이다. 시서를 논하기는커녕 성적 학대를 받고 독한 술을 위 속에 털어 넣기 위해 말이다. 그들을 돌려세우는 방법은 절망적인 청년실업의 늪에서 그들을 끄집어내는 것,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경제 살리기가 최우선이 돼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훈범 논설위원